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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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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내일의 반동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능력주의는 지위와 권력을 세습하는 귀족주의와 비교할 때에 혁명적으로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였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이라는 책에서 귀족주의의 반대말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17~18세기의 시민혁명 이후 존재해온 착한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영이 이 용어를 선보인 1958년경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 사실상 반동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던 시점이었다.

영은 당시 우경화하려는 노동당 정부에 경고하기 위한 풍자로 그 책을 썼지만, 영의 뜻과는 다르게 읽히면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노동당을 이끌고 1997년 총선에서 크게 이기며 영국 보수당의 18년간의 집권을 끝낸 토니 블레어는 "엘리트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영국은 능력주의가 지배한다"고 선언했다.

영의 책은 특히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인들은 능력주의를 대학교육은 물론 아메리칸드림의 이론적 기반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능력주의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차별의 피해자를 게으른 사람으로 비난할 수 있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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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미국 못지않게 능력주의를 예찬해온 나라인데,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압축성장의 동력은 바로 능력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슬로건이 전 국민의 가훈으로 받아들여진 가운데 능력이 오직 학력·학벌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평가되면서 전 국민이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오지 않았던가. 한국의 발전이 과연 그런 교육열 덕분이었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있긴 하지만,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이 발전에 친화적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고성장의 시대가 끝나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고, 개천에서 난 용들의 기득권 집단화가 공고해지면서 학력·학벌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가족의 능력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능력주의는 변형된 세습적 귀족주의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반동으로 전락한 능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혁명 이데올로기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과도기의 상황에서 큰 사회적 위기와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도한 임금 격차는 정의롭지 못하다. 정규직 노동자도 이 총론엔 공감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가 자신의 조직에서 이루어질 경우엔 반발한다. 그들의 반발은 '공정'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정규직이 되기 위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능력을 보이지 못한 사람들이 정규직이 된다거나 자신의 임금을 희생으로 해서 임금을 더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논리다.

그런 반발을 집단 이기주의로 비난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잘못된 게임의 법칙인데, 그 게임의 법칙에 충실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면서 수용하라고 하면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건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고성장을 전제로 한 능력주의의 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데, 이 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며 이거야말로 범국민적 공론화 작업이 필요한 사안이다.

이제 우리는 능력주의의 파탄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능력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그간 능력으로 간주해온 것에 따른 승자 독식 체제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바꿔나가야 한다.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법적 질서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부동산 투기나 투자로 번 돈을 불로소득으로 간주해 많은 세금을 물리는 법을 제대로 만들어 시행했다면 현 불평등 양극화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개천에서 난 용'에 환호하며 내 자식도 그렇게 키워보겠다고 허리끈을 조여 맸던 과거의 꿈에 이제는 작별을 고하면서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워갈 때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