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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갑질'을 없애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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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유해화학물질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의 명단을 상세히 공개한다. 평판이 나빠지면 주가 하락을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어떤 기업도 이러한 리스트에 오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리스트에 오른 기업들은 배출량 감소 조치를 취하는 건 물론 애초부터 이 리스트에 오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와 법률학자 캐스 선스타인이 쓴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책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나라라는 기록을 세운 우리나라에서 넛지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넛지의 수많은 방법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논란의 소지가 없는 정보 공개는 잘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넛지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설득'이므로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아니면 공개 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단체의 반발이 클 거라고 지레 겁을 먹기 때문일까?

그 어떤 이유 때문이건, 정보 공개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다. 시민이 구경꾼으로 머무르는 가운데 정부 홀로 하는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 중심의 민주주의가 퇴조하는 가운데 새로운 참여의 형식으로 떠오른 '정치적 소비자운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보 공개는 시민의 능동적 참여문화를 키울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물론 정치적 소비자운동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유권자의 소비자화'로 인한 '개인화된 정치'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정치적 소비자운동은 기업 권력의 비대화라고 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기성 정치의 실패에 대한 응답의 성격으로 나온 것이므로, 그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간 사회개혁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돼온 쇼핑 행위가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떠오른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선 오히려 쇼핑과 사회정의를 연결시키지 않는 소비행위를 더 문제 삼는 것이 온당하다.

정보 공개는 모든 분야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지만, 우선 우리 사회의 현안인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갑질은 지난 수년간 내내 뜨거운 이슈였음에도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정부와 언론 모두 사건·사고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국민적 분노를 일으킬 만한 갑질 사건이 터지면, 정부는 '사정 작업'의 접근법으로, 언론은 '여론 재판'의 접근법으로, 사건을 일으킨 기업에 몰매를 주는 게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식으론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법의 엄격한 집행과 더불어 시민사회의 힘을 상시적으로 빌릴 필요가 있다. 우선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해선 안 될 갑질의 기준을 세우고, 각 항목별 표준화된 점수를 근거로 전반적인 계량화를 하는 시도를 해보자. 이를 근거로 분기별 또는 반기별 '평균 이상 기업 리스트'와 '평균 이하 기업 리스트'를 작성해보자. '톱 10'도 좋고 '톱 20'도 좋다. 언론은 원래 '리스트 저널리즘'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서열이 있는 리스트를 사랑하므로 이 리스트를 열심히 보도할 것이다.

기준 설정과 계량화는 행여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끔 충분한 논의와 토론은 물론이고 공청회까지 여는 등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의 모델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선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은 단호히 배제하고 갑질처럼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회정의 이슈에 국한되어야 한다. 이런 응용된 정보 공개가 제도로 정착하기까지엔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므로, 당분간 '평균 이상 기업 리스트'만 작성해 보도하기로 하자.

대기업은 한동안 갑질 중단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겠지만 궁극적으론 혁신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자극과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기업들이 '평균 이상 기업 리스트'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느냐 하는 건 시민사회에 달려 있다. 즉, 소비자들이 시민으로서 쇼핑과 사회정의를 연결시키는 소비행위를 해주느냐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