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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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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ho1ogy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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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누구나 똑똑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전문가들의 의미 있는 조언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전문가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다. 누군가 전문가인 체하며 자기 견해를 밝히면 권위에 기대거나, 민주주의에 요구되는 합리적 대화를 고사시키려는 행동쯤으로 여겨 분노를 표출한다."

〈전문지식의 죽음〉의 저자 톰 니컬스가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문가의 죽음'까지 거론하게 만든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를 겪은 한국에선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다. '전문가의 죽음'이 권위주의적 독선과 오만, 엘리트주의적 특권의식과 이기주의를 청산하고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몇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니컬스는 밀려난 전문가의 자리를 차지한 건 셀러브리티, 즉 유명인들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는 유명인들이 미국 정치지형의 일부가 됐다는 점을 개탄한다. 유명인이 전문가를 대체하는 것도 문제지만, 전문가를 차별하는 것도 문제다. 전문가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모든 전문가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은 우러러보면서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정보와 지식을 공급받는다. 따라서 '전문가의 죽음'이라는 주장은 생각을 달리하는 전문가를 공격하고 논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민주적 정서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전문가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큰 문제는 시장논리에 따른 '의제의 왜곡'이다. 언론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언론은 팔릴 만한 뉴스, 즉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한 뉴스에 치중한다. 사건과 사고의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의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언론인이 몰라서 다루지 않는 게 아니다. 뉴스가 구조와 추상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한 뉴스'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못지않게 '신문의 죽음'이 심각하게 거론되는 미국에서 나온 언론학 서적들이 '신문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내놓는 처방의 핵심은 한결같이 '독자의 관심'이다.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은 언론인이라면 누구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철칙이지만, 언론이 그로 인해 잃는 것도 있다. 전문성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전문성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법을 터득하는 것에 관한 전문성일 뿐이다. 그것은 실수의 지뢰밭을 건너야 하는 전문성이다. 다른 언론보다 더 빨리, 더 말랑말랑하게, 더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위한 경쟁에서 실수는 불가피하다. 그런 실수는 이른바 '기레기'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 근원이 된다.

언론은 살벌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뉴스 의제를 사건·사고라는 피상의 세계에만 가두는 식으로 왜곡해왔고, 이젠 이게 부메랑이 되어 사건·사고에 이해관계나 특정 이념성·정파성을 갖고 있는 독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업자득이라고 말하기엔 언론이 처한 모든 여건이 너무 열악하다. 독자와 같은 눈높이를 갖기 위해 애써온 평등주의의 실현으로 자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야 할 것인가?

언론은 이제 스마트폰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언론은 이미 스마트폰과 손잡고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가 강제하는 뉴스의 형식적 제약은 뉴스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 영향은 '전문가의 죽음'을 촉진할 것인바, 언론에 남은 선택은 두가지다. '전문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언론으로 가는 길과 기존 노선을 완전히 바꿔 전문성을 주장할 수 있는 언론으로 가는 길이다. 후자가 살아갈 틈새시장은 존재하는바, 누가 그 시장을 선점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전문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이는 잘난 척하는 엘리트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신이 맡은 일에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은 것에 대한 인정과 보상은 그 어떤 평등주의 정서도 깰 수 없으며, 평등주의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전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는 것이 사면초가에 빠진 언론의 탈출구일 수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