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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민주주의'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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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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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까지 싸울 일이었나?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겠지만, 싸울 땐 그런 의심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말이나 글로 하는 수준의 싸움일망정 싸움은 터널에 갇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가리켜 '터널 시야'(tunnel vision)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 누구건 어떤 일을 놓고 누군가와 싸우게 되면 터널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건 싸움의 주제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싸움이 지속되면서 발생한다. 처음엔 어떤 일에 대한 생각 차이 때문에 싸우지만, 나중엔 그 차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 차이는 의인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반감이나 증오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터널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바깥세상이 보일 리 만무하니, 그런 반감과 증오에 대한 성찰은 시간이 흘러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에나 가능하다.

선거는 본질적으로 '터널 시야'의 게임이다. 경쟁자들과의 공통점은 감추고 차이점만을 부각시키는 게임이다. 공통점이 90%이고 차이점은 10%에 불과할지라도, 그 10%를 부풀려 자신의 상대적 우월성이나 비교우위를 강조해야만 한다.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증오 마케팅'은 필수다. 언론은 그런 '증오 마케팅'을 미주알고주알 전달해주는 일에 충실함으로써 그 10%의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정책이 서로 비슷해지면 싸울 일이 줄어들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미국 사회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처드 세넷은 영국의 여야 정당들이 주요 정책에서 내용이 대단히 유사한 표준 플랫폼을 공유하는 이른바 '플랫폼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상황에선 필연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수사법을 구사하는 '상징 부풀리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정치는 프로이트가 말한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긴 그렇다. '싸움 없는 선거'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후보와 정당들은 사소한 차이를 큰 것인 양 부풀리는 싸움을 하며, 그들 간의 차이가 사소할수록 싸움은 더 격렬해지고 증오는 더 깊어진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존재 근거는 물론 존재감을 확인 및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싸움은 일부 유권자들에게도 전염되기 마련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은 이른바 '대선과몰입증후군'의 소지가 다분한 유권자가 많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자신의 지지 후보를 남들이 비판하는 게 싫어 모임에 나가는 것을 끊은 사람, 지지 후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울감이 생기고 지인들과도 갈등을 빚는 사람, 지지 후보가 부당한 공격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생겨 술로 풀어야 하는 사람, 지지 후보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 짠한 마음에 눈물이 날 때도 있다는 사람, 지지 후보의 차이 때문에 여자친구와 사사건건 부딪혀 헤어지는 것마저 고려하고 있다는 사람 등 열정이 흘러넘치는 유권자들의 다양한 사정을 소개한 기사였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는 안도현 시인의 열정 예찬론의 관점에선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서로 상처를 주거나 받는 열정이어야만 하는가? 최근 출간된 〈시민 쿠데타: 우리가 뽑은 대표는 왜 늘 우리를 배신하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펜으로 밑줄을 그은 아래 문장에 공감하면서 새삼 떠올린 의문이다.

"시민의 권력이 두 선거철 사이에 놓인 시간 속에서도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도구와 장치를 상상하는 방향으로 창조성을 자극하고 격려, 고무할 때이다."

열정을 선거철에 특정 후보에게만 바칠 게 아니라 두 선거철 사이의 훨씬 더 많은 기간에 이슈와 정책에도 나눠주면 안 될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사람에겐 열정을 바쳐도 '도구와 장치', 즉 제도와 법엔 열정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 후에도 승리를 한 후보에 대한 '무조건 찬성' 아니면 '무조건 반대'의 전선이 지속돼 모두가 다 실패하는 비극이 빚어지곤 했다. 국민 통합이나 화합은 정치인을 자신의 분신이나 우상처럼 대하는 '팬덤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