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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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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MP
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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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대선 개표 상황이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기울던 날 밤 11시께 '우리가 몰랐던 나라'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나를 비롯해 아마도 <뉴욕 타임스>를 읽는 대다수 독자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운을 뗐다. 미국 시민들이 고위 공직자로서의 자질 부족이 명백한 후보에게 투표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나라가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할 순 없지만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사회가 됐다고 여겼는데, 선거 결과는 '우리'가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주로 시골 지역의 수많은 백인 유권자들은 미국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들에게 이번 선거는 핏줄과 땅, 전통적인 가부장 가치와 인종적 위계질서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의 주장에 반론을 펴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한겨레 기사를 그대로 길게 인용했다. 내겐 트럼프의 당선보다는 크루그먼의 생각이 훨씬 더 놀랍다. 힐러리를 지지하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 드러내는 무지와 편견은 보기에 딱할 정도다. 힐러리도 마찬가지다. 힐러리가 지난 9월 "트럼프를 지지하는 절반을 개탄할 만한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을 땐 남의 나라 선거임에도 혀를 끌끌 차면서 힐러리가 패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과 적의 지지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트럼프는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로 볼 수 있는 언행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런 혐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대다수가 트럼프의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가진 자들만의 놀이로 전락한 정치(금권정치)보다는 덜 중요한 이슈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간 언론을 포함한 주류 세력이 홍수처럼 쏟아낸 트럼프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트럼프의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에만 집중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헛장사를 한 셈이다.

크루그먼이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인인 나도 잘 아는 걸 크루그먼이 모를 리 없다. 그는 미국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가치 판단에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엘리트주의적 편향성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 중에 '가용성 편향'이란 게 있다. 속되게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노는 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엘리트 계급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일상적 삶이 서민 계급과 차단돼 있다는 점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머리로는 서민들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알망정 가슴으론 그들의 절박성에 공감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왜 당신들은 나처럼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에 분노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는 건 자신이 딴나라 세상 사람임을 실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지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인의 3분의 2는 미국 경제가 부자들을 위해 조작됐다고 여기며, 10명 중 7명이 엘리트 정치인은 보통 사람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인은 달리 생각할까? 한국의 엘리트 계급도 머지않아 '우리가 몰랐던 나라'라는 한탄을 할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리가 알 필요 없는 나라'라는 일관된 신념하에 사익 추구를 위해 국민을 우롱한 사람들의 문제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박근혜 대통령이 저지른 최대 범죄는 권력에 굴종하고 아부하는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이용해 수많은 권력자들을 자신처럼 국민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심맹'(心盲) 상태로 몰아간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이 분노하거나 고통을 느끼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면서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지만, 그들은 아예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국가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인데, 그걸 좀 뜯어먹은 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그들이 몰랐던 게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 무인도에 그들만의 나라를 따로 만들어줘야 하는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