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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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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래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는데, 영어판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 영어판을 사놓은 사람은 꽤 봤는데, 막상 완독한 사람은 별로 없더군요.

이 책에는 경제학자들의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식이 단 세 개만 등장합니다.
그만큼 저자가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경제학적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풀어서 해설하는 데 역점을 두고 서평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내 서평으로 이 책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우리 인간의 삶을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경제학은 수학적 논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실로부터 점차 괴리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제학이 엄밀한 방법론의 기초를 확립해 하나의 과학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과학적 접근방법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클 수밖에 없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것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뿐 아니라 이것이 얼마나 공평한지도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효율성에 대해 말하는 경제학자들은 많아도, 공평성에 대해 말하는 경제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공평성의 문제는 과학적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이유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과학적 접근방식에 대한 집착을 과감하게 버리고 다른 접근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 불행히도 그런 용기를 갖고 있는 경제학자가 별로 없다.

경제학자가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경제학만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삶에서 경제학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같은 인접 사회과학은 물론, 역사학이나 철학 같은 인문학을 아우르는 포괄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비로소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경제학자들은 우물 위로 보이는 좁디좁은 하늘이 세상 전체인 줄로 안다.

이 책의 저자인 피케티(Thomas Piketty)는 바로 이와 같은 경제학의 한계를 용감하게 뛰어 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여느 경제학자가 쓴 책과 다르게, 이 책에는 단 세 개의 수식만이 등장할 뿐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수식이 아니고 α=r×β 혹은 β=s/g처럼 초등학교 수학책에나 등장할 정도로 단순한 수식들이다. 그 대신 풍부한 역사적 사례 심지 어는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소설 같은 것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분배의 공평성 문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틀은 수학적 모형이 아니라 역사, 정치, 철학적 관점을 적절히 가미한 경제적 논리라는 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피케티는 프랑스 역사에서 소위 Belle Époque라고 불리는 시기를 자주 언급한다. 그 시기는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된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의 전성기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1871년으로부터 시작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이르는 제3공화국 시절이 바로 Belle Époque인데, 평화와 번영, 신기술과 과학의 발전, 문화의 융성이 특히 돋보였던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역사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습된 자본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암울한 측면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 시기는 미국 역사의 도금 시대(Gilded Age)와 상당 부분 겹치고 있는데, 화려한 외면의 뒤에 극심한 분배상의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서로 놀랍게 닮아 있다.

피케티는 이와 같은 두 나라의 극심한 불평등성이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시기에 급격한 반전의 양상을 보이는 데 주목한다. 그는 비록 미국과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말한다. 분배상황 변화의 장기추세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결과로 경제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쿠즈네츠(S. Kuznets)가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반전의 추세였다. 그의 '역U자가설'(inverted U hypothesis)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의 초기에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다가 성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서 평등 화로의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통계자료에 기초해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이 가설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그와 같은 평등화로의 반전추세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쿠즈네츠의 역U자가설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법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장의 초기단계에서는 불평등화의 요인이 많이 발생해 불평등도가 점차 높아지다가 성숙단계에 이르면 평등화의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것이 경제성장 과정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이와 같은 설명이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정점을 달리던 불평등성이 1914년을 전후해 갑자기 반전의 양상으로 돌아선 것은 그와 같은 경제성장 과정의 동학 때문이 아니라 그 후 두 번에 걸쳐 발생한 세계대전과 이로 인한 제도적 변화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1)

피케티가 보기에 분배의 불평등성을 가져오는 핵심적 요인은 바로 자본(capital)이다. 노동에서 나오는 소득과 달리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은 (부유한)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한 경제의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분배상태는 더욱 불평등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유한 사람일수록 저축성향이 높기 때문에 이 자본소득 중 많은 부분이 저축되어 자본은 더 큰 규모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자본을 상속 받은 후속세대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과는 관계없이 대를 이어 부유층에 편입되어 또 다시 사회의 지배계층이 된다.

이와 같은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과정과 이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가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그는 자본이 축적된 그 세대에만 불평등성을 만들어내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세습자본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Belle Époque와 미국의 도금시대가 바로 그 세습자본주의가 최정점에 달했을 때라고 본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각국의 자본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던들, 그리고 각국 정부가 누진적 소득세제를 도입해 자본축적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세습자본주의의 쇳바퀴는 아무 제동 없이 그 예정된 길로 돌진해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피케티가 예의 주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시기는 1980년 이후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때 이후 다시 불평등화로의 급격한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들은 그와 같은 불평등화로의 반전에 대한 많은 가설을 제시했지만, 그는 그 어느 것에도 별로 설득되지 않는 모습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과 그것의 축적과정에 있는데, 지금까지 제시된 그 어떤 가설도 이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1980년대 이후 진행되어 온 불평등화의 근본원인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세습자본주의가 세계 대전의 충격을 이겨내고 원래의 궤도로 되돌아오게 된 데서 불평등화로의 반전이 일어나게 되 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체제는 왜 외부적인 제약이 없는 한 끊임없는 불평등화의 길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피케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자본주의의 기본법칙(fundamental law of capitalism)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그가 말하는 제1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2)

α=r×β
(여기서 α는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의 비율, r은 자본수익률, β는 자본/소득비율을 뜻함)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성립하는 보편적인 법칙의 성격을 갖는데,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자본수익률과 자본/소득비율(자본의 총량이 국민소득의 몇 배 수준인가를 나타내는 값)의 곱과 같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경제에 존재하는 자본의 총량이 국민소득의 6배이고 (연간) 자본수익률이 5%라고 한다면 자본의 소유자가 얻는 소득은 국민 소득의 30%라는 말이다.3) 따라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고 할 때 자본수익률이 올라가거나 자본/소득비율이 커지면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이율은 따라서 커지게 되어 있다.
이어서 피케티가 말하는 제2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4)

β=s/g
(여기서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을 뜻함)

이것 역시 보편적 법칙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한 경제의 자본/소득비율은 저축률을 경제성장률로 나눈 값과 같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이 매년 소득의 12%를 저축하는 상황에서 그 경제의 성장률이 2%라면 자본의 총량은 국민소득의 6배 수준이 된다는 말이다. 이 식을 보면 저축률이 높고 성장률이 낮은 경제에서는 자본이 빠른 속도로 축적되어 자본/소득비율이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식을 함께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소득분배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있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일단 저축률은 일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자. 이 상황에서 경제성장률(g)이 낮을수록 β의 값이 커질 것이고, β의 값이 커지면 α, 즉 자본소득의 점유비율이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제1법칙을 나타내는 식을 보면 β의 값에 아무 변화가 없어도 r, 즉 자본수익률이 커지면 자본소득의 점유비율이 더 커진다. 따라서 경제 성장 과정에서 g와 r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자본소득의 점유비율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로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r>g의 관계가 성립한다면, 즉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다면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더 커지게 된다.5) 그리고 이렇게 자본소득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소득분배는 더욱 불평등해지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r과 g의 값이 과연 어떤 크기일 것이냐에 있다. 피케티는 바로 이 대목에서 자본주의경제의 성장과정을 역사적 안목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해온 긴 역사에서 과연 두 변수의 값이 어떤 추이를 보여 왔는지를 예의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케티는 인류의 역사에서 경제성장률이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수준을 이루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1700년대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세계 경제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고작 0.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700년에서 1820년 사이의 기간에는 약간 올라 0.5%대가 되었다가, 1820년에서 1913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다시 1.5%대로 올라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1913년부터 2013년에 이르는 기간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3.0%대로 올라, 우리가 지금 보는 수준의 경제성장률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어찌 보면 20세기의 성장률이 예외적인 것이고 장기적으로 본 평균 성장률은 이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일지 모른다는 것이 피케티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자본수익률의 장기추이는 어떤 양상을 보여 왔을까? 경제이론에 따르면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자본수익률은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게 된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체제의 기본적 운행원리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피케티가 수집한 장기 통계자료에 따르면 자본수익률은 거의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이렇다할 하락 현상을 관찰할 수 없었다. 그는 평균적인 자본수익률이 대체로 4-5% 수준에 유지되어 왔고, 이것이 2-3% 수준으로 떨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경제 발전의 역사에서 줄곧 r>g의 관계가 유지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불평등성은 점차 심화되어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거의 7백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논의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피케티에 따르면, 다만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인 우연이 개입된 나머지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평등화로의 일시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본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타격을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본은 상당한 회복세를 보이고, 21세기에 들어옴에 따라 19세기 말 Belle Époque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분 석이다.

피케티는 현재에 이르는 분배상태의 장기추세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전망까지 내리고 있다. 만약 지금까지 보여온 장기추세와 비슷하게 자본수익률이 4-5% 수준을 유지하고 경제성장률이 1-2% 수준을 유지한다면 자본/소득비율(β)은 걷잡을 수 없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며, 이에 따라 자본소득의 점유비율(α)도 계속 높아져 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에 따라 세습자본주의의 토대는 한층 더 확고해지고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성의 정도는 역사상 최고의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 자본주의경제의 앞날에 대한 그의 우울한 전망이다.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세습자본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가 경제적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구태여 능력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열심히 노력할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자신의 능력, 노력과 무관하게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일 수 있을까?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이미 이런 사회로 변해 버렸고 앞으로 그와 같은 경향은 한층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 피케티의 전망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피케티의 우울한 예언이 너무나도 잘 들어맞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경제성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듯, 세계 경제는 이미 장기적 저성장의 단계에 진입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방식을 통해 r과 g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대안은 어떤 방법으로든 r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본소득에 충분히 높은 세율을 적용해 세후(post-tax) 수익률을 낮춘다면 둘 사이의 격차를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평등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으로 인해 높은 소득에 대해 엄청나게 높은 세율을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높은 세율을 통해 자본축적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자본주의경제의 내재적 불평등화 요인을 잠시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새처리즘(Thatcherism)으로 대표되는 보수혁명 탓에 이제 그 정도로 높은 소득세율은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다. 이에 더해 세계 경제가 글로벌화 되어감에 따라 각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세율을 낮춰가는 풍조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득세율을 전반적으로 낮추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소득에 대해서는 특히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케티가 우려하고 있는 범세계적 차원의 불평등화는 브레이크 없는 전동차처럼 예정된 길로 줄기차게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피케티는 이 거대한 힘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강한 누진성을 가진 소득세, 상속증여세, 그리고 재산과세가 합동작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소득세와 상속증여세는 모든 나라에서 이미 광범하게 부과되고 있지만, 재산과세는 본격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 지방정부의 주요한 조세수입원으로 재산세(property tax)가 부과되는 경우는 많지만, 모든 형태의 자본에 대해 광범하게 과세하는 사례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글로벌한 차원의 자본과세(global tax on capital)를 불평등화 추세에 대항하는 주요한 정책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케티가 말하고 있는 글로벌한 차원의 자본과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모든 나라들이 공조체제를 구축해 똑같은 세율을 적용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자본을 합산한 금액이 부과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재산이 많을수록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누진적인 세율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나라들이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자본이 이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세율을 낮춰 가는 '바닥으로의 경주'(race to the bottom)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은 자본과세가 실시되어야만 한다.

사실 프랑스를 포함한 몇 나라는 피케티가 제안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방식의 자본과세를 이미 실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는 130만 유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부과되는 Impôt de solidarité sur la fortune(ISF)이 시행되고 있는데, 그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자본과세는 이 세금과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본과세를 세계의 주요 국가가 모두 채택함으로써 자본의 이동이라는 부작용 없이 자본축적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제시된 그의 핵심 아이디어인 것이다.

불평등성 심화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의 조세제도 개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소득세와 상속증여세의 누진성은 크게 높이고, 누진성을 갖는 자본과세를 도입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피케티 자신도 이와 같은 개혁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예를 보면 누진성을 강화하기는커녕 그 반대의 길을 줄곧 달려왔을 따름이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은 상속증여세의 영구 폐지까지 획책한 바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본과세라는 새로운 조세를 도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말하고 있듯, 역사상 경제적 엘리트계층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개혁에 선뜻 동의한 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예상한 것처럼, 이 책이 나오자마자 피케티에 대한 보수진영의 벌떼 같은 공격이 시작됐다. 그를 아예 '마르크스주의자'(Marxist)로 몰아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계처리상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삼아 그의 학문적 성과를 통째로 부정하려는 사람도 나왔다. 사실 그가 현재의 여러 변수 값이 앞으로도 그 수준에서 유지되리라는 가정하에서 미래의 분배상태를 예측한 것이나, 혹은 불평등화 추세에 대한 대책으로 글로벌한 차원의 자본과세를 제안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소지를 갖는 문제다. 피케티 자신도 이를 흔쾌히 인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건설적인 토론을 통해 만족스러운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크루그먼(Paul Krugman)이 New York Times에 기고한 서평에서 지적하고 있듯, 보수세력의 악의적인 공격은 건설적인 토론과는 거리가 먼 실정이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불평등이 왜 나쁘냐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맨큐(Greg Mankiw)는 "Defending the One Percent"라는 글에서 바로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의문에 대해 피케티는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사회는 분배상의 불평등이 혈연이나 지대가 아닌 능력과 노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불평등은 공정하며 모든 구성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한에서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롤즈(John Rawls)의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연상케 하는 이 말은 나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 다.

지금까지 소득분배의 문제를 이렇게 본질적이며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의 사례를 본 적이 없다. 자본축적의 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설명한 그의 해석은 탁월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조세정책 등으로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체제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화의 경향을 보인다는 그의 분석결과는 자본주의 그리고 불평등성에 대한 우리 인식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중요한 발견이다. 크루그먼이 말하듯, 피케티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의 담론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셈이다. 사실 이 책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치밀한 소득분배 관련 통계자료 정리 작업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사에즈(Emmanuel Saez), 영국의 앳킨슨(Anthony Atkinson) 같은 학자들과 힘을 합쳐 세계 여러 나라의 최상위계층의 소득점유비율의 추이를 계속 추적해 왔다.

그들이 최상위계층의 소득점유비율의 장기추이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된 배경에는 이를 통해 전반적인 분배상황의 변화추이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들의 지적에 따르면, 가계서베이(household survey) 결과에 기초하고 있는 기존의 분배 관련 통계자료는 불평등성의 정도를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하는 문제점을 갖는다.6) 실제로 사람들이 납부한 소득세 자료에 기초해 분배 관련 통계를 작성하면 신빙성이 훨씬 더 커진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100년 내외의 오랜 기간 동안에 걸친 세계 각국의 소득세 납부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했다. 이 작업에서 나온 성과가 바로 이 책이 그 기초를 두고 있는 World Top Incomes Database(WTID)인데, 이 성과 하나만으로도 피케티와 그의 동료들은 경제학계의 박수갈채를 받아 마땅하다.7)8)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경제학자들에 대한 피케티의 직설적인 비판이다. 책의 서두에서 그는 경제학계가 수학과 순수이론에 대한 유치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은 현실의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자신들만 흥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수학적 문제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역사적 관점에서의 연구나 인접 사회과학과의 생산적인 협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수학에 대한 집착이 경제학을 과학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유치한'(childish)이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평소 경제학계, 특히 미국 경제학계에 대해 그가 얼마나 큰 불만을 가져왔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피케티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미국에서만큼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사실을 하나의 장점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라면 경제학자들이 구태여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을 테지만, 프랑스에서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무조건 믿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 설득해야만 하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른 학문은 무시해도 된다는 근거 없는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런 오만한 태도를 가진 경제학자들이 실제로는 현실의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거침없는 비판을 날린다.("They know almost nothing about anything.") 평소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비판이다.

불평등성의 심화를 막는 조세제도 개혁이 어려운 이유로 피케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제적 엘리트의 반발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이 같은 조세제도 개혁 반대세력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미국 대학은 민간부문에 인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경제학 교수의 급여를 크게 올리는 추세를 보여 왔다. 부유해진 경제학 교수들은 자신을 기득권층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불평등성의 완화에 도움이 되는 조세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그가 3년 동안의 짧은 미국 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 배경에 이와 같은 동료 경제학자들에 대한 환멸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나로서 한 가지 흥미롭게 여겨지는 부분은 이와 같은 피케티의 비판이 미국 경제학자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국 경제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비판일 수 있다는 사 실이다. 수학이나 순수이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인접 학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지적 오만, 자신을 기득권계층과 동일시하는 보수성향 ― 이 모든 것들이 미국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한국 경제학자들에게 그대로 들어맞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내 개인적 견해에 따르면, 이런 점들에서 한국 경제학자들이 확실하게 한 술 더 뜨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제학자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경제학의 지평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중요한 저작임에는 한 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명석한 분석 능력에 경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의 좁은 틀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와 문학에까지 서슴없이 발을 들여놓는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기도 했다. 확실히 그의 책은 여느 경제학자의 책과는 달리 인문학적 취향을 짙게 풍기는 품격을 갖추고 있다.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저자의 능력이 바로 프랑스 교육의 특성이자 감추어진 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박학다식함이 때로 독자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옥의 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소득분배의 장기추이라는 핵심 주제가 선택되었다면 책 전체가 이것을 중심으로 꽉 채워진 구성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핵심 주제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간간히 눈에 띈다. 너무나 많은 것은 알고 있고 따라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독자를 한 방향으로 치열하게 이끌어 가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책의 분량을 크게 줄여 가독성을 높였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 책 분량을 지금의 반으로 줄여 핵심 사항 위주로 논의를 전개해 갔어도 중요한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만연체에 가까운 현재의 체제는 독자들을 조금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욕심을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한 진리가 아닐까?

원래 프랑스어로 출판된 이 책의 영어판이 나오자마자 5십여만 권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고 한다. 사회과학 서적으로서 이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끈 책은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로서 흥미 있는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책을 실제로 완독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영국 물리학자 호킹(Stephen Hawking)이 쓴 A Brief History of Time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책을 읽은 사람은 팔린 부수의 1/10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의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전망해 본다.

그런 예측을 하는 이유는 경제학의 배경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 책을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데 있다. 경제학자의 장난감이라 할 수 있는 수식이 단 세 개만 등장할 정도로, 저자가 나름대로 일반 독자에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서술 방식도 경제학자 특유의 전문가인 척하는 난삽함을 버리고 대중적인 친근감을 선택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경제학의 배경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 등장하는 경제학적 논리를 제대로 소화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혼자만의 힘으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앞에서 설명한 소득분배 전개과정의 기본논리를 파악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 서평에서 책의 주요 내용에 관한 해설에 치중한 이유는 일반 독자들의 이와 같은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될지와 상관없이, 이 책은 이미 미국 사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피케티현상'(Piketty phenomenon)이라는 지적풍토의 대혁명을 가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 동안 온 세계를 휩쓸어온 신자유주의의 이념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을 숱하게 본다. 피케티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이 헛된 이념의 노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며칠 전 한국은행 총재가 "소득분배 불평등의 해소는 유효수요를 높인다. 성장잠재력 확보를 위해 내수기반을 확충하려면 불평등의 정도를 줄여야 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보수적 정권하의 중앙은행 총재로서는 무척 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발언인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우리 정부의 고위직 입에서 이런 발언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책담당자든 지식인이든 "무엇보다 우선 성장을 해서 파이를 키워야만 가난한 사람에게 가는 몫도 커진다."라는 케케묵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의 입에서 '공평한 분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는 '좌빨'이 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를 불문하고 공평한 분배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핵심 요건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공평한 분배라는 말을 잊어버린 채 살아 왔다. 바로 이와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경제학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피케티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피케티현상은 분배문제에 관한 발상의 대 전환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발상의 대전환을 목이 타게 고대해온 나로서는 피케티현상의 확산이 너무나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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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가 말하는 제도적 변화의 핵심은 전비 조달을 위한 누진적 소득세제의 채택이다.

2) 국민소득을 Y, 자본의 총량을 K라고 할 때, β는 K/Y로 표현할 수 있고 자본소득은 rK가 된다. 이 식의 우변은 r×K/Y이 되어 좌변과 같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경제학원론에서 가르치듯, 국민소득(Y )은 노동(L)과 자본(K)이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만들어낸 상품의 가치와 같다. 이렇게 국민소득 중 30%가 자본소득으로 분배되면 나머지 70%는 노동소득으로 분배된다.

4) 저축이 된 것은 자본의 증가(∆K )로 이어지기 때문에 저축률 s는 ∆K/Y와 그 값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 g는 ∆Y/Y를 뜻하므로, 이 둘을 위 식의 우변에 대입하면 ∆K/∆Y가 나온다. 엄밀하게 말해 β는 K/Y를 뜻하기 때문에 좌변과 우변이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변의 s와 g의 값이 매년 똑같은 수준에 유지된다면 장기에 걸쳐 자본/소득비율이 양자 사이의 비율과 같아지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제2기본법칙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5) 제2법칙을 나타내는 식을 제1법칙을 나타내는 식에 대입하면 α=r×s/g가 된다. s의 값이 일정한 수준에 머문다고 할 때 r이 g보다 더 크면 α의 값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를 서베이자료의 경우 소위 top-coding이란 기법이 적용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연 소득 10억원 이상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소득 금액을 밝히지 않고 얼마든 간에 '10억원 이상'이란 범주로 묶어서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Bill Gates나 Warren Buffet 같은 사람의 소득과 괜찮은 수입을 얻는 변호사가 똑같은 소득을 얻는 것으로 취급되는 결과가 빚어진다.

7)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사에즈는 미국 소장 경제학자 최고의 명예인 J.B.Clark 메달을 받았다. 한편 피케티는 유럽 소장 경제학자 최고의 명예인 Yrjö Jahnsson상을 수상했다.

8) WTID를 만든 경제학자들은 누구든 자신의 사이트에 들어와 통계자료를 얻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http://topincomes.g-mond.parisschoolofeconomics.eu/)

*이 글은 이준구 교수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