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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아니라도 피해자 입장에 서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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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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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상당부분 유태인에게 독일의 개인과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거였습니다. 그 자리에 중국인 등 비슷한 다른 집단이 있었다면 그들이 표적이 되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이 원론적으로 있었다고한들 히틀러가 한 짓이 유태인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처럼 황당한 논리는 없습니다.

예컨대 강남역의 범인이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대로에서 아무에게나 난사했을지도 모르죠. 총은 남자보다 강하니까요. 원자폭탄이 있었다면 자신을 '무시한' 도시나 국가 하나를 파괴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 논리는 누구나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혐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삼고 공격한다는 사실을 다시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남성에게 여성은 현실 속에서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 벌어진 일은 그보다 구체적입니다. 그가 기다렸고 살해한 사람은 노인, 장애인, 어린이, 취객 등 다른 약자 집단의 일원이 아닌 랜덤한 여성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자신의 입으로 여성 일반에 대한 비뚤어진 분노를 드러내기까지 했죠. 그가 조현병 환자라고 한들 이게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까. 조현병 환자의 여성혐오 범죄인 거죠. 정신질환 여부는 처벌과 치료 등 사법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사회적인 맥락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 논의되고 있는 여성혐오 개념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여성혐오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사안에 따라 혐오라는 말이 뉘앙스상 과한 건 아닌가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그런 의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남성에게 이 범죄의 책임을 지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런 범죄가 생겨나는데는, 혹은 어떤 사람이 세상이 미워 살인을 하는데 그 핑계와 대상을 여성으로 규정짓게 되는 데는 그만한 사회적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개인의 '깊은' 내면과 '진짜' 본심 등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분석할 몫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점에서 살인이라는 구체적 범죄와 그의 여성 관련 선언, 그리고 무엇보다 랜덤하게 살해당한 피해 여성의 존재가 드러내는 바는 명백합니다. 어떤 여성이든 그 자리에서는 죽었을 것이다, 라면 그것이 바로 여성혐오 범죄입니다.

영국에 살면서 길을 걷다가 우유곽이 머리에 날아온 적이 있습니다. 우유가 반쯤 들어 있었구요.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다가 옆에 정차 중인 스쿨버스의 백인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걸 보고서야 깨닫게 됐죠. 제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당한 겁니다. 그 아이들이 가정이 불행한지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세상이 싫은지 정신질환이 있는지 마약을 하는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때도 알고 지금도 아는 것은, 그 일이 사소하나마 명백한 인종혐오 범죄였고 저는 그 희생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어떤 동양인이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유곽을 맞았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 사실이 개인으로서의 제 입장보다 저를 더 슬프게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안을 봐야 합니다. 남자친구와 함께 놀러 갔던 노래방에서 단지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왔다는 이유 하나로 칼에 찔려 죽은 그 분의 입장 말입니다. 개인으로서 어떤 항변도 불가능한 채 단지 여성 젠더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죽은 것입니다. 그 시선에서 보지 않으면 결코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자칫 예민한 문제를 피해갈 논리를 개발하려 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범인의 개인적 사정이나 조현병 등은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따져야 할 그 개인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 사건의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해자와 같은 젠더라는 이유로 이 사건의 사회적 의미를 외면하려 든다면, 그 순간 거대한 가해자 무리의 한 구석에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