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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노조는 왜 이제 파업하냐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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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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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와 KBS의 파업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지난 정권들의 반민주적 언론 탄압이 만연하던 시기엔 숨죽여 있다가 이제 와 세상이 바뀌니 뒤늦게 왜 목소리를 높이냐는 말들.

2.

우선 지난 9년의 시간 동안 현 파업 방송 종사자들이 침묵했다는 주장에는 쉬이 동의할 수가 없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입바른 소리를 하다 좌천되거나 쫓겨나고 회사 밖에서까지 투쟁을 이어오던 그들의 이력들이 수많은 기사들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내부의 심정적 지지자들 또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들을 설쳤겠나. 먹고사니즘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나의 현재뿐 아니라 내 자식과 부모의 미래까지 좌우한다. 먹고사니즘 앞에 나약했던 인간을 옳고 그름의 길로틴 위에 세우는 것만 능사로 보겠다는 것은, 군집생활이라는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오류들의 귀책을 전부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리겠다는 뜻이다.


3.

돈을 잘 벌거나 출세하는 것만이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그로부터 오는 불안을 감당하는 각자의 정신력과 의지는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강인하게 헤쳐나갈 수 있지만 누군가는 자존심과 맞바꾼 타협으로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심약한 한 사람의 결론을 오로지 개인의 의지와 능력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게 옳다면, 사회는 육체적/심리적 약자들의 손을 잡아줄 이유가 없다. 그러면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복지정책들은 설 자리가 없다.

4.

이는 평등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기존체계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려는 진보나, 개인능력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보장해주려는 보수의 가치에도 어긋난다. 민주국가에서 진보와 보수는 민주주의의 결실로 얻을 공평무사를 위한 방법론이다. 언론탄압이 가져오는 문제의 본질은 이러한 방법들의 이념적 가치가 훼손된다는 것에 있다.

이념은 어떤 거룩한 철학의 이름으로만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실질적으로는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것이 간혹 국가적 폐해로 귀결된 적은 있어도 공멸의 목적을 위해 발화된 이념이 공중에 인정받은 적은 없다. 이념적 가치의 훼손은 늘 특정한 이념을 사익의 도구로 변용해 왔던 이들에 의해 벌어진다.

5.

먹고사니즘이라는 사익과 공공에 협력하는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의 판단은, 당사자 한 사람의 내적 동기만으로 결론 나지 않는다. 이는 종종 사회규범이나 법 등으로 제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속한 환경이 용인하는 사익추구의 경계선이 어디에 위치 하느냐이고, 따라서 시민사회라는 환경의 성숙도와 직결되어 있다. 정부의 수준과 마찬가지로 언론의 수준은 시민사회의 수준에 영향 받는다. 언론의 의지는 시민의 의지 하위에 위치한다.

지난 촛불시위도 반민주 정권을 향한 시민사회의 의지가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은,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약속에 깃든 국가와 국민 사이의 위상 차를 스스로 지켜내고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판의 주인은 '우리'라는 확인이다.


6.

주인이 바뀐 뒤 세상이 좀 더 정상화되고 나서야 방송국 내부의 뜻있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또렷해진 현상은 흩어진 각 개인의 나약함을 증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언론의 정권부역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지목할 수는 없다. 심지어 첫 번째 파업도 아니고 그들이 부역 주동자도 아니다.

지금 방송가의 파업은 지난 겨울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사회의 의지가 행동으로 옮겨진 결과다. MBC와 KBS 파업의 시기는 행위의 결과이지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 원인을 찾겠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 즉 우리에게 있다.

7.

지난 박근혜 탄핵정국을 이끈 촛불시위는 국가단위 시민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용산에서 사람들이 죽어갔을 때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영방송 사장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쫓겨났을 때도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도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쌍용차 노조진압 때에도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정권이 정치적으로 악용했을 때에도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방송 언론이 정권의 노리개가 되는 과정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지난 촛불시위 때처럼 하지 않았다.

때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각자의 생업과 삶에 이러한 의제들은 간단히 저울질됐다. 그렇다면 먹고사니즘 앞에 나약했던 것은 방송국 사람들뿐이었을까. 이제와 파업한다는 비난이 그들에게만 향하는 게 맞을까.

이 파업의 시기를 결정한 것은 방송사 노조인가 시민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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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론의 수준은 시민의 행위가 갖는 수준에 맞춰진다. 잘 키운 만큼 잘 큰다. 언론의 생장은 시민사회가 만들어주는 환경에 영향 받는다. 모든 시민은 언론의 부모다. 언론의 강직함은 강직한 시민사회가 본 보여주고 지켜줄 때 유지된다.

그러므로 시민사회가 자기 자식들을 정권이라는 남의 손에 빼앗기고도 즉각 다시 데려오지 못한 것을 놔둔 채 왜 바르게 자라나지 않았느냐 다그치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과 사랑과 보호를 다하지 않은 채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 엄마아빠는 그때 날 버리고 오랫동안 찾지 않았나요."


9.

빼앗긴 아이를 뒤늦게라도 다시 데려오겠노라고 겨울 맨바닥에 삭풍 맞아가며 애쓴 보람을 파업이라는 목소리로 들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남의 집에 잡혀가 학대로 고통 받던 아이가 실어증에 걸리지 않고 돌아온 것을, 아직 목숨과 인격이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긴다. 이제라도 소리 내는 사람들은 가느다랗게 남아있던 그 아이의 생존의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이가 되레 죄송하다고 입을 뗀다. 그리고 아프다고 소리 내 운다. 그럼 엄마 아빠가 진작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부둥켜안고 더 크게 우는 게 부모이지 않은가. 실컷 울라고, 이제 여기 주인은 우리니까 네 맘대로 울어도 괜찮다고.

지금이라도 불을 당긴 방송노조들의 파업에 시민사회는 그동안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0.

글쎄, 난 그들에게 쓴소리를 차마 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고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창피해서.

그러니 나의 격려는 미안함으로부터.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