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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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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상당수가 석·박사들로 구성된 정부 출연기관 노동조합이 봄에 파업을 시작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조합원이 노조 위원장에게 "이 파업이 언제쯤 끝날까요?"라고 물었다. 위원장은 "아무리 길게 가도 가을이 오기 전에는 끝나지 않겠어?"라고 답했다. 결혼식 날짜를 넉넉하게 11월로 잡았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부 관료가 기관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 노조 간부 해고를 지시하고 고의적으로 파업을 유도한 사실 등 회사의 온갖 비리가 드러났다. 회사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한 새 노동조합이 설립되기도 했다. 10여건의 고소·고발과 민형사 소송 등을 겪느라고 노동자들은 곤욕을 치렀다.

그 조합원은 파업 271일째를 맞은 날 결혼식을 올렸고 내가 주례를 맡았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나를 구석 자리로 끌고 가더니 말한다. "양가 부모님이 아직 파업한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파업에서 꼭 승리하세요!' 그런 말씀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같이 웃으면서도 목이 메었다.

산동네 공부방 어린이들이 나와서 축가를 불렀다. 파업 와중에도 신랑 신부는 3년 동안 해온 공부방 교사 자원봉사 활동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정말로 '목청껏' 부르는 축가를 들으며 그간의 사정을 아는 신랑 신부 직장 동료들과 주례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06년 어느 가을날의 결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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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여년 세월이 흐른 며칠 전, 또 다른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다. 신랑에게 문자메시지로 물어보았다. "신부에게 특별히 고마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잠시 뒤 답이 왔다. "제가 노동조합 간부라는 이유로 어르신들이 결혼에 반대하셨지만 노조 간부를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어렵사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기다려준 신부에게 고맙습니다."

결혼식 사회를 맡은 청년이 난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어르신들이 노동조합에 대해 너무 민감해하셔서요... 제가 주례님을 '노동대학 학장'이나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라고 소개할 수는 없고 그냥 '성공회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시는 교수님'이라고..." 내가 말을 자르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편 따라 해야지요." 무난하게 주례사를 끝냈다.

지난해 말, 인천성모병원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향년 53살의 간호사가 세상을 떠났다. 조합원이 250여명에서 10명으로 '쪼그라든' 노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조 지부장을 맡아온 사람이었다. 빈소를 찾은 동료들은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승진에서 번번이 누락돼 그 나이에 응급실 3교대 근무를 해야 했다"며 울분을 삭였다. 해고된 전임 지부장은 추모사에서 "수도 없이 고소·고발을 해 대서 법정 문을 노조 사무실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며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던 고인이 "자랑스러운 조합원 10명"이라는 표현으로 판사를 감동시켰던 일화를 떠올리며 울먹였다. 고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며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가입 활동을 재개했고, 병원에는 기존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새 노조가 설립됐다. 이쯤 되면 거의 교과서다.

영화 <1987>을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은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고 "비싼 등록금 내고 데모나 한다"고 비난하던 시민들이 시위 청년들을 숨겨주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감상평도 보인다. 그러나 그 세월 동안 우리 사회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은 사람이 많겠지만, 그렇지 않다.

노동현장 활동가들은 영화 <1987>에 나오는 것과 거의 같은 강도의 결단을 지금도 계속 요구받고 있다. 세계 최장 408일 굴뚝농성을 벌이며 어렵사리 맺은 약속을 회사가 지키지 않아서 또다시 75미터 높이 굴뚝에 올라가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60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들이나, 서울 강남역 삼성전자 앞 길바닥에서 농성 827일째를 맞은 삼성 직업병 '반올림' 활동가들이 감내하는 고초를 어찌 영화 <1987>에 나오는 것보다 수월하다 할 수 있겠는가?

똑똑한 후배들로부터 "하 선배도 이제 노동조합에 가입하라고 강조하는 얘기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충고를 받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그 진부한 얘기를 남은 평생 동안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