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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론 멸종될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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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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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맞붙었다. 당시 여당 민자당은 김대중 후보가 "빨갱이"라고 맹공을 펼쳤다. 민주당은 "아무리 패색이 짙다고 '30년 민주동지'라던 사람을 용공으로 몰 수 있습니까?"라는 문구가 담긴 공보물을 배포했다. 거대 여당의 "용공론"에 대응하기 위해 김대중 후보는 "이기는 반공"을 내세웠다. "진정한 국방은 완전한 자유와 사회 복지를 실현해 공산당이 감히 야욕을 가질 수 없는 이기는 반공"을 실현할 후보가 김대중이라며, "용공조작이 없는 세상, 이기는 반공을 위해 이번에는 바꿉시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빨갱이라는 그 강력한 언어 앞에 진정한 국방, 완전한 자유, 사회 복지는 맥을 못 추었다. 결국 김영삼 후보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이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마다 야당 후보는 색깔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색깔론은 친북, 반미, 빨갱이, 종북으로 변형되어 상대방 후보의 안보관을 왜곡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다. 오로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가짜 뉴스를 생산, 유포하며 자신의 안보관만이 대한민국 유일 안보관이라고 선동했다. 거짓과 진실의 구별은 의미가 없는 분별이 되었다. 색깔론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야당으로 살아가는 민주진영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였다.

민주주의의 현장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슈와 논쟁이 있다. "어떠한 복지와 성장 그리고 안보가 시민의 온전한 일상을 보전할 수 있는가?"라는 여러 방법론이 경쟁할 때 대한민국이 강해진다. 정책 경쟁이 색깔론과 같은 인위적 조작과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국민의 합리적 선택이 가능하다. 오로지 정권 안보가 지상과제인 정치집단은 일부 언론권력과 결탁하여 강력한 색깔론 프레임을 구축했고 국민을 겁박하였다. 색깔론은 보수진영의 무능력과 부정 그리고 부패를 덮을 수 있는 아주 편리한 방어망이었다. 결국, 지난 9년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색깔론이 대한민국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에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국방예산은 40조원 이상을 들이면서 국민 안전은 소홀히 하였다. 왜 자꾸 3년이 지난 세월호를 들먹이냐는 어떤 후보의 발언은 국가의 안보와 시민의 안전을 따로 생각하는 몰상식한 안보관의 대명사이다. 그렇다고 국가안보를 잘 관리하지도 못했다. 자주국방이 동맹의 아늑한 품속으로 들어갈수록, 전시작전권 환수는 아득한 꿈이 되었다. 악화된 북핵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36조원어치의 미국산 무기를 수입한 세계 1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동맹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비아냥을 듣는다. 사드를 어두운 밤에 기습 배치한 이후 돈을 내야 한다는 미국에 항의도 못한다. 여전히 가짜 안보세력은 한반도 안보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색깔론으로 가두어 버리고 그들만의 안보 독과점을 구축하려 한다.

색깔론 저편에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의 국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진짜 안보가 있다. 바로 일도양단의 사고방식보다 평화와 성장의 로드맵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진짜 안보다. 북한의 평화적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 대한민국의 안전을 실현할 당당한 협력외교가, 한반도의 전쟁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결연한 국방의 의지가, 이 피곤한 적대적 분단을 해소할 풍부한 상상력만이 이 지긋지긋한 색깔론을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일주일 후 색깔론이 멸종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