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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색지대' 그리고 HBO 드라마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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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엄마는 율 브리너를 굉장히 좋아했다. TV를 보다가도 율 브리너가 나오면 오 율 브리너, 하면서 채널을 고정했다. 어렸을 때는 저 눈 큰 대머리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명절만 되면 <왕과 나>와 <아나스타샤>를 되풀이해서 보게 되었다. 율 브리너를 정말 좋아하게 된 건 좀더 자란 이후에 우연히 <황야의 7인>을 보면서부터였다. <황야의 7인>을 보고난 이후 나는 율 브리너 대머리에 솟은 힘줄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훨씬 더 어렸을 때 이야기다.

새벽에 미군방송을 돌려보는 건 내 중요한 취미생활 가운데 하나였다. 일전에 이 지면에서 소개했다시피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록키 호러 픽쳐쇼> 같은 인생 영화도 발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채널 2번을 틀어서 뉴스가 나오면 그냥 자고 영화가 나오면 끝까지 봤다. 그 새벽 나와 미군방송 사이에는 한·미 혈맹을 압도할 만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것 같은 불안함과 묘하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새벽에 몰래 나와 작은 볼륨으로 미군방송을 틀었다. 다행히 뉴스가 아니라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서부영화 같은데 율 브리너가 나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율 브리너는 대사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저 큰 눈을 부라리는 차디찬 율 브리너가 검은 옷을 입고 주인공들을 집요하게 쫓았다. 별 내용도 없이 계속해서 쫓고 괴롭히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다 주인공들의 반격으로 율 브리너의 얼굴 반쪽이 날아갔다. 깜짝 놀랐다. 다음 장면은 더 충격적이었다. 날아간 얼굴 절반에는 피와 근육 대신에 기계 부품과 가짜 이빨이 붙어 있었다. 이거다! 끝내준다! 나는 바로 매료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색지대>(원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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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크라이튼이 연출하고 율 브리너와 제임스 브롤린(그렇다, 조시 브롤린 아빠다)이 주연을 맡은 <이색지대>는 근미래, 서부시대를 가상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테마파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막대한 돈을 내고 테마파크를 찾은 관광객들은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기계인간들에 둘러싸여 가상 서부시대를 체험한다. 그런데 기계인간들 가운데 하나가 오작동을 일으킨다. 율 브리너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고 주인공들을 섬멸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무지막지한 캐릭터다.

<이색지대>는 별다른 야심이 발견되지 않는, 거침없는 오락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색지대>는 이후의 대중문화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카메론은 <이색지대>에서의 율 브리너 캐릭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얼굴이 벗겨지고 기계가 드러난 예의 이미지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멈추지 않는 모습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그가 구상하고 있던 이야기의 악역 캐릭터에 이를 차용했다. 그게 <터미네이터>다.

존 카펜터 또한 무표정하게 살인에만 집중하는 율 브리너 캐릭터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고 있던 다음 프로젝트의 살인마 캐릭터에 가져다 썼다. 그게 <할로윈>의 마이크 마이어스다. <터미네이터>와 <할로윈>은 두편 모두 크게 성공했고 자기 장르에서 확고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이색지대>는 레퍼런스가 된 영화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감춰진 레퍼런스다.

하나 더 있다. <이색지대>를 쓰고 직접 연출까지 한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이클 크라이튼은 영화를 끝마치고 나서도 이 주제에 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테마마크에서 지나친 과학의 오남용으로 인해 재해가 발생한다'는 플롯이 마이클 크라이튼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나 더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쓴 게 <쥬라기 공원>이다. 단 한편의 영화가 이토록 굵직한 레퍼런스들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는 건 놀랍고 근사한 일이다. 이런 경우는 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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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에서 방영 중인 미드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이하 <웨스트월드>)은 바로 이 영화 <이색지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원작 <이색지대>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던 특정 이미지와 썩 괜찮은 아이디어 덕분에 유효한 것이지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3회가 방영된 시점에서 판단해보건대, <웨스트월드>는 이제 종영이 멀지 않은 <왕좌의 게임> 이후 의 밥벌이를 책임질 공산이 크다.

미드 <웨스트월드>는 원작과 같은 설정을 가지고 있다. 서부시대를 가상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가 있다.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건 고도의 인공지능 기술로 완성된 기계인간들이다. 운영진은 관람객의 욕망을 채우는 데 한치의 부족함이 없도록 기계인간들을 철저하게 유지 보수한다. 관람객들은 이곳을 찾아와 기계인간을 상대로 모험의 욕구, 살인의 욕구, 섹스의 욕구를 채운다. 그리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긴다. 인공지능에 마지막 업그레이드가 실행된 이후 소수의 기계인간들로부터 이상 징후가 목격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 조작된 세계임을 감지한다.

조너선 놀란과 J. J. 에이브럼스가 연출과 제작에 참여한 미드 <웨스트월드>는 저 둘의 이름값을 매회 해낸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고 있는 중이다. 조너선 놀란은 이 기획에 대해 "웨스트월드는 인간이 더이상 주인공이 아닌 인류 역사의 다음 장을 다루는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앤서니 홉킨스나 에드 해리스의 존재감은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배우들의 연기가 거의 악기처럼 보일 정도로 훌륭하게 조율되어 있다.

조너선 놀란과 J. J. 에이브럼스는 더없을 최고의 조합처럼 보인다. <웨스트월드>가 지금과 같은 놀라운 퀄리티를 유지한다면 저 두명이 이 놀라운 성과의 지분 대부분을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이름은 동시에 매우 큰 부담요소이기도 하다. 조너선 놀란과 J. J. 에이브럼스의 드라마 시리즈들은 그간 떡밥으로 흥했으나 뿌려놓은 떡밥을 제대로 운영해내지 못하고 이야기를 방만하게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의 만족스럽지 않은 시즌 운영이나, 특히 <프린지>의 대참사를 떠올려보면 그냥 <웨스트월드>를 보지 말까, 싶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웨스트월드>는 이미 너무 많은 떡밥이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다. 나는 이런 비밀스럽고 음산하며 음모론적인 떡밥의 힘에 쉽게 매료되는 편이다. 그러나 거둬들일 의지가 없는 떡밥은 애초 뿌리지 않는 게 옳다. <웨스트월드>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오늘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이나 율 브리너 영화를 한편 돌려보고 자야겠다. <터미네이터>에 <할로윈>에 <쥬라기 공원>에 이제는 미드 시리즈까지? 이들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재미있는 일이다.

* 이 글은 씨네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