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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어른'은 불가능한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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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설거지] 젊은이들이 점점 더 불리해지는 세상, 그들에게 보내는 '반성문'

내게는 문신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른쪽 팔에 쓰인 글귀가 무슨 뜻인지 물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비밀이라고 말했다. 혹은 '탕수육은 소스에 찍어 먹는 게 아니라 소스를 부어 먹는 것이다' 정도로 때에 따라 다르게 설명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단한 글귀라서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남에게 권할 것이 아니라 입 다물고 내가 혼자 조용히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까먹지 않으려고 굳이 살 위에 써놓은 것인데 그 의미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낭비가 아니겠는가. 탕수육 이야기는 다시 한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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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고 쓰여 있다. '68혁명' 당시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대중에 알려진 글귀이지만 대개의 유명한 펀치라인이 그러하듯이 실제 화자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실 내게는 그게 누가 한 말인지보다 문장 자체가 더 중요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되 결코 이루어질 리 없는 뜨거운 무언가를 그 기반에 두자는 것.

이 생각은 내게 참 소중했다. 내가 만난 많은 어른들은 정확히 그와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몽상가처럼 세상에 관한 따뜻하고 근사한 말을 늘어놓되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단 한치의 손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뜨거움으로 그를 믿어왔던 주변의 많은 이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건 그들이 딱히 남들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편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훨씬 더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게 내가 살아오면서 목격하고 학습한 이 세상의 '어른스러움' 혹은 '사회화'였다.

스물두살이었다. 군대를 제대했지만 복학하지 않았다. 등록금과 집세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건설 현장에서 모래를 고르는 일부터 아무개 브랜드의 피팅모델까지 하루에 몇개씩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나는 이 피팅모델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떠벌리는 경향이 있다. 나도 젊고 예뻤다.) 그러다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일이 텔레마케팅이었다. 아무튼 나는 입으로 하는 일에는 뭐든지 자신이 있었다.

서울 광화문의 큰 빌딩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나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어린애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이 아이들보다 유능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지 않고 테헤란로 직장인의 각도로 비스듬히 서서 큰 소리로 전화를 해댔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정대만(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등장인물. 부상 탓에 농구를 그만두고 불량배가 됐다가, 은사를 만나 "농구를 하고 싶어요"라며 눈물의 고백을 한 뒤 '포기를 모르는 남자'로 거듭난다) 생각을 했다. 내가 당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노력의 아이콘이었다. 면접을 보러 들어갔는데 하마터면 감독님 전화로 물건을 팔고 싶어요, 라고 말할 뻔했다. 사흘 후에 합격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엄청나게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더니 그때 사무실 앞에 앉아 있던 애들 그대로 다 있더라.

사무실은 인사동의 작은 건물로 옮겨졌다. 일전의 큰 빌딩은 본부고, 이렇게 팀을 꾸려 다른 사무실로 분가하는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팀장은 다소 비만에 나이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른 즈음으로 보였다. 부장은 바싹 말랐고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물건을 팔기 위한 전화 통화 시나리오를 각자 써냈다. 내 것이 채택되었고 나는 곧장 부장의 신임을 얻었다.

'육체 노동이여 안녕, 아이엠에프(IMF) 시대는 금 모으기가 아니라 오직 나 같은 인재를 발굴하는 일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차량에 설치하는 지피에스(GPS)를 팔았다. 당시의 지피에스는 화면 같은 게 없었고 그냥 과속 카메라가 있을 때 음성으로 신호를 보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그걸 엄청나게 팔았다.

부장과 인사동의 작은 민속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좋은 어른으로 보였다. 부장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이야기도 하고 정치 이야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팀원들이 하나같이 자식 같고 가족 같은데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시대를 잘못 만나 이렇게 나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다,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 나는 엄청나게 감동했다. 그리고 저런 어른이 되어서 나중에 나보다 어린 청년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장은 9월25일 도망쳤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건 그날이 월급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근했더니 사무실 문은 잠겨 있었고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한살이 더 많다는 이유로 대책위원장 비슷한 것이 되었다. 팀장을 찾아가봤지만 자기도 피해자라는 말 이외에 별게 없었다. 부장은 사무실 집기와 직원들의 두달치 월급을 챙기고 사라졌다. 경찰과 노동청을 방문해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하면서 나는 참 마음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그 좋은 부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두달 후에야 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동대문 이대병원 앞에서 만났다. 부장은 자기를 그만 괴롭히라고 말했다. 돈이 있으면 주지 않았겠느냐며 자기는 가족이 전부 흩어져서 고시원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원래 고시원 살았다는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다가 목젖에 걸려 허우적대며 도로 들어갔다. 부장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게 무척 슬펐다.

이후로 많은 어른들을 만났다. 나는 불행하게도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이 사회 일반의 반영인지 혹은 그저 나의 박복함의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최악의 어른이란 늘 갱신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상황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 나빠졌다. 아주 잠깐 불었던 20대 청년운동의 바람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윽박 아래 수렴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 위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리해지고, 그 불리함은 더욱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어졌으며, 젊은이들은 거짓 위로로 가득 찬 힐링 스폿들로 파편화되어 도피했다. 어른들이 만든 체계가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그걸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명백한 죽음을 두고도 어른들은 좌와 우를 나누어대며 남겨진 자들을 능욕했다.

나도 이제 그들의 나이에 가깝게 되었다. 정말 무서운 건, 나도 그런 종류의 어른스러움에 너무나 익숙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늘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자기보다 어리고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냉정하되 속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그에 기반해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젊은 이의 신념을 위해 내 신념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되고 싶은 어른으로 나이 먹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멀어져가는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났을 때,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럽고 슬프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