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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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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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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설거지] 가장 거대한 사람이 가장 작아진 이야기

사절 갱지를 가로로 세 번 접고 세로로 두 번 접는다. 접힌 면을 따라 자른다. 이걸 몇 차례 반복한다. 잘라진 종이들을 모아 한쪽 면에 스테이플러를 박는다. 스테이플러를 박는 과정에서 정렬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최대한 체중을 실어 종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눌러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연필로 이야기를 썼다. 구상을 한 건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썼던 것 같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그때는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등 고딕 호러소설의 주인공들과 웰스의 <우주전쟁> 부류의 공상과학(SF)소설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히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등장해서 싸우는 이야기를 썼다. 정확히는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 싸우다가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에 맞서 협력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것과 제본의 순서가 거꾸로 된 것 같지만 변명을 하자면 나는 열 살이었다. 방학이 오면 내내 그런 걸 여러 편 썼다. 여러 편을 썼지만 독자는 늘 한 사람이었다. 엄마였다.

그때는 엄마가 참으로 거대한 사람이었다. 이걸 써서 엄마에게 읽어주고, 엄마가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걸 듣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늘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쓴 건 <터미네이터 2>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썼던 <터미네이터 3>였다. 기체 터미네이터가 등장하는데 화산으로 끌고 가서 증발시킨다. 이미 기체인데 어떻게 증발시키는지에 관한 과학적 검증 과정은 없었다. 나중에 고쳐 쓸 법도 했지만 당시 아버지와 다투고 난 직후였던 엄마가 내 소설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소설 쓰는 일을 집어치웠다. 아마 이건 엄마도 모를 거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내게 정말 거대한 사람이었다.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장난감을 사달라 졸랐고 조금 크고 나서는 책을 사달라 졸랐고 너는 왜 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는 놀림을 당한 이후에는(퍽 더 팔학군) 옷을 사달라 졸랐지만 한 번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속만 상하지 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엄마가 책을 사주지 않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책 없이 살지 못하는 아이가 된 건 엄마 탓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나이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 엄마가 <이야기 성서>라는 걸 몇 권 사 왔다. 그런데 그걸 아버지랑 상의하지 않고 산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상의하지 않고 뭔가를 사는 걸 싫어했다. 몇 번 큰소리가 오고 간 이후 엄마는 장롱 안 깊숙이 책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을 때만 읽으라고 신신당부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까지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게 책을 읽는다는 건 늘 큰 일탈이었다. 해선 안 되는 일이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었다. 초인종 소리만 나면 후다닥 책을 치워 장롱에 집어넣고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게다가 내용도 만날 신이 화를 내고 벌을 내리고 멀쩡한 남의 아들을 제물로 내놓으라 하고 그걸 진짜로 하나 안 하나 간을 보면서 애정투쟁을 하거나, 사람들을 싹 다 잡아 죽이니 신명이 났다. 그 뒤로 나는 내내 책에 미쳐 살았다.

언젠가 한번은 엄마 지갑에 손을 댔다. 그걸 엄마가 알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나갈 채비를 하더니 나를 붙잡고 터미널 앞 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 파출소에 들어가 자수를 하라고 말했다. 자수를 하라니. 그 사람 많이 오가는 광장의 파출소 앞에서 나는 설마 그냥 겁만 주는 거겠지, 생각하고 그냥 서 있었다. 그러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거기 네 시간 동안 서서 울다가 간신히 엄마의 용서를 받고 은촛대를 받은 장발장의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고속버스터미널 앞에는 겁이 나서 잘 가지 못한다.

그렇게 엄마는 늘 거대했다. 두 형제를 혼자 맡아 키우게 되면서 그녀는 더 커지고 강해졌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독립하면서 엄마의 거대함이 희미해졌다.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나는 가족끼리 서로 폐 끼치지 않고 살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래도 없었다.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더 이상 엄마는 거대하지 않았다.

지난 정권,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광장 위에 있었다. 밤이었다. 그날은 집회 규모가 꽤 컸다. 나는 혼자였다. 당시 촛불집회의 쉼터 같은 역할을 했던 광화문 앞의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내 팔을 콱 움켜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건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에 가장 현실 같지 않은 순간이었다.

엄마가 웃으면서 서 있었다.

엄마는 하도 뭐가 문제라고 하길래 한번 나와봤다고 말했다. 누가 들으면 요 앞에 사는 사람이 작은 집회 구경 나온 줄 알겠지만 사람들은 종로를 가득 메울 만큼 많았고 엄마는 수원에 살았다. 나를 어떻게 찾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보이길래 잡았다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그때 기억을 되짚어보면 엄마는, 엄마는 작았다. 엄마는 작고 나이 들고 약했다. 나는 화를 냈다. 아직 택시 할증 안 붙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를 두고 내 갈 길을 갔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어딘가에 기고한 글을 읽고 여기 나온 것이 분명한 엄마를 보는 게 고통스러워서 도망쳤던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작고 나이 들고 약한 사람이 여기 있는 게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작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큰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청계천을 가운데 두고 빌딩 뒤쪽으로 돌아가는데 함성이 크게 들리고 난리가 났다.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개중에는 다치는 사람도 보였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건물 사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진압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엄마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저앉아서 기계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수신음이 뚝 끊기더니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엄마는 하도 시끄러워서 전화 온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 일이 종종 떠오른다. 엄마가 너무 작았다.

그녀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 생각을 하면 나는 늘 조금 울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엄마 무릎 위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