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정산 Headshot

아니키즘을 이해하지 못한, 영화 〈박열〉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평소에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고 또 내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는 점도 있고 해서 이준익 감독의 〈박열〉을 보고 왔다. 한마디로 말해 좀 지루한 인물 소개 이상은 아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는 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사는 어설프고 구성은 엉성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거기다 이렇다 할 미장센도 없어 기억되는 장면도 없다.

일단 이 영화는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가진 것 없고 사회에서 박해만 받은 후미코가 권력을 저주하게 된 배경 설명 정도로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있다. 영화 막바지에 후미코가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재판정에 등장하는 것이 대단한 아나키즘적 민족 연대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일본 여자를 조선인으로 만들었다는 한풀이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나키즘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없고 결국은 안이하게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

아나키스트 한일 커플 박열과 후미코라는 인물은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이다. 영화는 이 매력적인 인물을 제대로 형상화해내지 못했다. 허접하고 엉성한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투옥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스스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그렸다면 아주 진지한 문제작이 되었을 것 같다.

아니면 좀 더 대중적인 흡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훨씬 치밀한 구성이 필요했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치인들의 암투와 일본 검사와 언론과 당시 항일운동권의 움직임 등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스릴과 반전을 만들어 냈다면 지루함은 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감독은 실화 인물을 그려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서사와 플롯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다.

조연들의 코믹한 캐릭터는 더 거슬린다. 영화의 유머코드는 적당해야 하고 또 절제되어야 한다. 어울리지 않게 남발되는 과도한 유머코드는 그저 모든 엉성함을 덮어 관객의 시선을 억지로 잡아놓으려는 가련한 잔머리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지루함을 참고 보고나서 애국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 초반부에 불을 붙여도 터지지 않는 실패작 폭탄이 등장한다. 딱 그것이 이 영화의 특성을 표현해 준다. 뭔가 터뜨려주는 한 방이 끝까지 지루하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1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