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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을 짠 것은 여성들이 아니라 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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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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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이틀 동안 손이 떨려서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사건 그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세상의 반응을 보면서 이것은 결코 한 정신병자의 난동으로 축소할 문제가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온 세상이 그런 식의 표적 살인에 공모하고 동조하고 있다. 압도적으로 높은 확률로 살인 등 강력범죄 피해자가 여성인 현실에서, 이러한 범죄의 특수성을 규명하고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떤 죽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모든 공론화와 정치적 투쟁은 무엇이었느냐고 묻고 싶다. 4.19 도 한 학생의 무고한 죽음을 규명하고 그것을 자행한 권력을 심판하고자 일어난 혁명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여성이면, 이것은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간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프레임을 짜서 혐오를 부추기거나 성별 대결로 몰아가지 말라고 한다. 멀쩡히 길 가던 내 목을 조른 술주정뱅이는 '심신미약' 상태임에도 아저씨나 남자를 동반한 여성은 피했고 나를 선택했다. 이 문제를 '주폭 문제'에 파묻어버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는 전형적인 물타기이다. 여성 표적살인은 그런 식으로 차곡차곡 이 사회가 허용하고 길러온 범죄이다.


2.

한 생명이 '성별'을 이유로 표적화되어 선별 살인당했는데 묻지마 살인이라고 부르고, 정신질환으로 책임을 돌려 열심히 투병하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서사를 부여하고 구실을 준다. 하나의 죽음이고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일 뿐이니 '적절'하게 추모하고 넘어가라는 말은 결국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온 "가만히 있으라"의 변주일 뿐이다. 젠더 문제만 들으면 곧장 편가르기로 번역해서 열심히들 날뛴다. 자신이 틀렸을 것이라는 가정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이 모든 반응들을 여성들의 '비이성적'이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번역하는 지적 게으름은 해악이다. (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어떤 남자들'로부터 무수한 위협을 겪어보고 또 어떤 남자들을 통해 그 위협을 벗어나본 경험이 몸과 머리에 지울 수 없이 새겨져 있는 여성들이 가장 잘 안다.)


3.

이 문제로 '남자친구'나 '남편'과 다투었다는 연락이 어제부터 끊이질 않는다. 참담하다. 한 생명의 죽음과, 성별이 곧 과녘인 생활을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마저 "잠재적 범죄자로 몰리는 내 억울함"이 우선인 언어들을 보며 나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라도 되는 권력은 너무나 의연하고 뻔뻔스러워서, 백 번 눈높이를 맞춰서 설명하고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귀를 열고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팔짱을 끼고 "내 생각은 이런데 날 설득시켜봐"라는 태도를 취한다. 조금만 스스로 공부하고 찾아보고 생각하고 의심해봐도 균열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점인데 말이다.


4.

의도적으로, 아주 의도적으로, 남성들의 글을 많이 페이스북에 가져왔다. 저열한 사람들에게는 글쓴이의 성별이 곧 그 말의 권위와 당위와 논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그 젠더 권력에 기대려는 목적보다는, 여기에서 '젠더 문제'를 빼라고 하면서 공론화를 '여자들만의 유난'으로 축소하려는 것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천계영 작가가 트위터에 쓴 것처럼 성차별 문제는 남녀 대립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성은 얼마든지 여성혐오를 할 수 있고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양산할 수 있다. 약하다는 것이 곧 옳음이나 선함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곧 청렴함을 의미하지는 않듯.

프레임을 짠 것은 가해자였고, (해칠 수 있는 남성/해쳐도 되는 여성) 그것이 살인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젠더 논의는 프레임을 짜는 것이 아니다. '프레임 때문에 발생한 혐오 범죄'에서 프레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막을 사회적 안전장치를 촉구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막으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눈 먼 드잡이처럼 보인다면 평생 가야 프레임 안에 들어갈 일이 없는 꽃밭 인생이라는 뜻이다. '남자들도 다 위험한 세상이다'라고 항변하겠지만 그러려면 살인 피해자의 성별 비율부터 확인해보자.


5.

억울한가. 나도 억울했다. 내가 여자인데, 페미니즘 공부를 몇 년을 했는데 이게 성차별/성소수자 차별 발언이라니. 부들부들했던 날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언제든지 내 못난 부분이 터져나갈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이래 줄곧 잘못된 관습과 차별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은 내재화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었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유리잔에 빠진 파리일 수밖에 없다. 딱 자기한테 보이고 자기가 감각할 수 있는 만큼만 해석한다. 그게 인간의 한계다. 모든 것을 관전하고 쯧쯧, 감정적이고 우매한 것들, 하고 혀를 찰 권력은 인간에게 없다. 그랬다면 다양한 해석이 필요한 예술 따위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과 판단은 주체가 생존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생존을 이야기하고, 다음 피해자를 막고 싶어하는 것이다. 추모와 재발을 막으려는 노력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선동과 '이때다' 싶은 팝콘으로 보인다면 명백하게 당신이 뒤틀린 것이다. 그 절박함을 1g도 이해하지 못해서 가능한 상상이다. 사회적 약자가 죽은 구조적 문제라는 뻔한 이야기는 누구나 눈 감고도 한다. 지금까지 지체되었던 한 걸음에 핵심이 있다. 아감벤은 단어의 의미를 에둘러 표현하거나 의미를 흐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한다며 '홀로코스트' 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다고 말한 적 있다. 여성혐오 범죄는 여성혐오 범죄이다. 세상엔 많은 약자들이 있지만, 그 살인자가 새벽 1시 번화가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기다린 것은 '아무나'도 아니고 아동도 장애인도 이주노동자도 성소수자도 아닌 '여자'라는 기호였다. 이 범죄의 특수성을 기어이 외면하려는 이들에게 나는 정말로 묻고 싶다. 왜 사회적 약자를 목표라 한 범죄에서 피해자는 번번이 '여성'인지, 왜 달에 인간을 보내는 시대에 '물리적으로 약하다'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성별이 압도적으로 높은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지 정말로, 하나도, 한 번도, 이상하지 않았는가? 가해자가 짠 프레임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여성들이 피해자의 역할에 배치되는 프레임에 가담하는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