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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커플이 사내연애를 하기까지 겪은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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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L은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엔 그저 싹싹하고, 열심히 하는 후배에 불과했고, 그래서 많이 가르쳐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기도 그 연차에 비슷한 고민들을 했었고, 그래서 조금 먼저 알게 된 팁을 알려줘 조금 더 빠르게 회사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메신저로만 하던 대화는 커피 한 잔으로 옮겨갔고, 오프라인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메신저를 본 날은 소식이 궁금해 문자를 보내게 되었고, 그 이후엔 종종 전화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유익했다. 절대적인 나의 편이 없는 외로운 회사에서 '우리는 한 편'이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쌓이자 동료들에게는 쉽게 털어 놓지 못했던 나의 고민들도 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서로만이 알고 있는 정보까지 공유하게 되니 회사생활도 더 잘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회사에 가는 것도 즐거워졌다. 성과, 평가, 경쟁 속에서 기댈 곳 없던 자기에게 언제든 나를 믿어주고 도와주는 조력자의 존재가 있다는 건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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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A부터 Z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회사 생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녀와의 대화는 친구보다 편안했다. 친구와 이야기하려면 "우리 회사에 X과장이랑 C차장이 있는데, 그 C차장이 X과장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거든. 그 둘이 1년 전에 무슨 프로젝트를 할 때..."부터 시작해 배경설명만 몇 분을 해야 겨우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X과장이 이번에 C차장이랑 붙었잖아"라는 말만 던져도 배경설명 없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D업체 얘기 들었어?"라고 시장상황을 물어도 바로 대화가 이어지며 유익한 정보들이 오고갔다.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팁을 얻을 때도, 누군가의 뒷담화가 필요할 때도, 시장 상황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때도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들 관계의 경계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회사를 떠나면 연락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밤 늦게는 물론 주말에도 문자와 전화를 주고 받게 되었고, 회사가 아닌 곳에서는 커피 한 잔도 하지 않았지만 평일 저녁 밖에서도 밥을 먹게 되었으며, 회식이 끝난 후 술에 취한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게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동료를 넘어 여자가 되어 있었다. 

"면접 끝나고 나서, 저... 차라도 한잔 하러가지 않을래요?"
_ 영화 <500일의 썸머> 중에서


삭막했던 직장생활을 달달하게 탈바꿈 시켜주며, 무거웠던 출근길을 가뿐하게 바꿔주는 직장생활의 꽃(?). 사.내.연.애. 

2015년 6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522명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사내 연애'에 관해 설문조사를 했더니 전체 응답자의 57.3%가 사내연애, 혹은 썸을 타본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해 2월 잡서치가 631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결과도 47.7%로 비슷했다. 직장인의 절반 정도가 사내연애를 경험해 본 것이다. 

주변만 살펴봐도 사내연애에 대한 경험담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으니 굳이 설문조사의 수치만 근거하지 않더라도 많은 직장인들이 사내연애를 경험하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친구들만 봐도 절반 정도는 (일로 엮여 연애를 하게 된 커플까지 포함한) 사내연애를 해봤고, 30% 정도는 결혼까지 골인했다. 실제 나의 첫 직장도 사내커플이 꽤 많았고, 부부가 함께 출퇴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 속 남녀가 만나는 장소가 회사라는 것도 사내연애가(혹은 일로 인해 시작된 사랑이) 그리 특수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회사 안에서도 충분히 로맨틱한 사랑이 펼쳐지고, 다채로운 연애가 가능하다. 그 사랑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 전에 애인이 있지 않았던 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거의 모든 생활이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인간관계 역시 회사를 중심으로 맺어지다보니 바깥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게다가 나의 관심사 역시 대부분 회사에 있다보니 전혀 다른 업계나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다른 점에 호기심이 생기지만 그것도 잠시, 오히려 소통의 답답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그러니 하루 8시간 이상, 때로는 주말까지 함께 해야 하는 직장동료는 사랑에 빠지기 딱 쉬운 조건 속에 있다. 의지할 수 있고, 매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며, 업무와 관련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고민을 쉽게 이해해주고, 가까이서 도와줄 수도 있으니 이보다 더 든든한 애인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L의 이야기처럼 사내연애를 시작한다. 조심스럽게. 비밀스럽게. 

사내연애가 달달함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내연애를 조심스러워 한다. 그건 아마도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헤어졌을 때와 그 사랑이 부적절한 상대일 경우. 

사내연애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하는 연애와는 다르다. 불편하면 피하면 되고, 만나기 싫으면 안 나가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바로 어제 헤어졌더라도 회사에서 그를 만나면 평소와 마찬가지로 반갑게 웃으며 인사해야 하고, 함께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 함께 마무리 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이별을 경험했더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나를 배신하고 힘들게 했던 천하의 나쁜 놈일지더라도 존중하는 파트너로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사내연애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밀연애를 택하기도 하지만 비밀은 새어 나가라고 존재하는 법. 그 많은 사내 스캔들이 술자리 단골 안주로 올라오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내연애의 적지 않은 부분이 불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사내에서 여자를 만났다면 귀여운 수준, 기혼자들의 썸도 만만치 않다. 지난번 회식이 끝나고 J와 R이 같은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더라, K가 A의 자리에 갔다가 메신저를 봤는데 T랑 엄청 진한 수준의 메신저를 하고 있다더라 등의 스캔들은 아주 빠르게 퍼져나간다. 굳이 찌라시로 도는 몇몇 기업 내에서의 불륜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불륜설만 봐도 영화를 만드는 일터에서 벌어진 부적절한 사내연애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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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스파우즈(office spouse)라는 말이 있다. 일생을 함께하며 중요한 많은 것을 상의하고 결정하는 배우자의 존재처럼 직장 내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회사 내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의논하는 이성 동료를 일컫는 말이다. 야근에 특근까지 많은 우리 사회에서 배우자와 동료 중 누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긴 지를 따져보면 동료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회사 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는 존재가 있다면 매우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어쩌면 축복 받은 일일 것이다.

내게도 첫 직장에서 만나 서로 다른 회사를 다니면서도 동종 업계에 있다는 이유로 8-9년간을 알아오며 일주일에 서너 차례 통화를 하는 남자 선배가 있다.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직과 관련해 고민이 들 때 그 선배에게 조언을 요청하고, 나도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선배의 부탁을 들어주며 관계를 유지해왔다. 재미있는 건 우리는 따로 약속한 바는 없지만 업무 시간 외에는 통화하지 않으며, 따로 만나 밥을 먹거나 하지도 않는다. 1년에 한 번도 얼굴을 못 볼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서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수시로 업계 정보를 공유하거나 조언을 주고 받으며 지낸다.  

문제는 이 오피스 스파우즈와 불륜의 경계선이 한 끗 차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성의 관계라는 것, 한쪽의 가정이나 연애사에 문제가 발생해 그 문제가 오피스 스파우즈의 관계 속에 스며든다면 충분히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답답한 가정사에서 벗어나 짜릿함을 전해주고, 회사라는 재미없는 공간 속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존재. 이 달콤한 유혹은 어쩌면 거부할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 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내연애는 달콤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잘 한다면 활력소가 되지만, 잘 못한다면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리 수도 있으니깐. 그렇다고 시작되는 사랑을 거부하라는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피할 필요는 없지만 신중해야 하는 관계임은 명심해야 한다. 둘만이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 회사, 동료라는 관계에도 겹쳐지는 관계니깐. 함께 일하는 이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사랑이 끝난 뒤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