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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 클린턴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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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놀랍게도 박근혜와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박근혜는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애' 시절을 넘어 정계에 재입문한 이후의 박근혜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는 '여성스러움'을 무기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박정희가 낳은 삼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활동 가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임을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중성 명사인 '후계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성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9말0초의 진보진영은 한바탕 뜨거운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걸 논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실상은 '여자로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말한 최보은에 대한 인간사냥에 가까웠다.

그 인간사냥이 문제였던 것은 최보은의 '지지 선언'의 반어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최보은을 몰아가던 자들, 대표적으로 김규항 같은 사람들은, 2002년 당시 정치인 박근혜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역할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계자 중 주류 정치권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소실이라는 정치적 역할이 박근혜에게 할당되었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성 역할을 밀어내버렸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비판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고 있지만 박근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자의건 타의건 수행하고 있었던 '여성의 성 역할 거부'는 '남성 되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대선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검증을 당한 대선 후보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긋나긋한 굿 와이프' 따위의 역할을 거부했다. 빌 클린턴의 불륜은 힐러리 클린턴의 '성적 매력'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시시덕거림을 낳았지만, 애써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인의 성별로 인해 남자들이라면 받지 않을 검증과 비난과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스마일링 맘' 같은 태도를 취하면, 요컨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익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언제나 단호하게,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정치인'으로서 페미니즘적 의제를 선언하고 또 실천했다. '굿 와이프'로서의 자신을 연출하면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도모하는 대신,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 정치인'을 받아들일 때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일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백악관 시절 이후 뉴욕 상원의원으로서의 경력이 쌓였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대단한 정치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뒤틀어서, 가령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정치판을 뒤치닥거리해주는 엄마' 같은 역할을 감내하지 않고서, '여성이면서 워싱턴 정가를 주무르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본의 아니게 도달한 지점도 사실 그와 같았다. 박근혜는 '아줌마'도 '아가씨'도 '엄마'도 아니었다. 한때의 '영애'였지만 성인으로서 정치인이 된 후에는 줄곧 '박근혜'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정치적 상징 자산에 힘입은 것이지만, 사실 정치권 내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모든 여성들이 누려야 마땅한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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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자리를 그냥 획득했고, 그에 딱히 미련을 갖지도 않았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대통령'의 표정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중년 여자'를 드러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실은 멍청하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한 게 아니라며 푸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둘러대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 성 역할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수명은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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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싸워 얻어낸 위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수십년에 걸쳐서 사냥했던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전리품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울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와 클린턴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어떤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정치 경력은 반드시 이 시점에서 끝장이 나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을 거부하면서 정치적 커리어를 쌓는 여성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힐러리 로뎀 클린턴을 지지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출현을 두 손 모아 소망하면서 말이다.


* 이 글은 노정태의 블로그에 게시되었습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