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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애도와 저항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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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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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도 눈물이 난다는 반응이 압도적인 것으로 보아, 확실히 뉴스의 주인공인 대통령을 향해 집단투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며칠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난 후,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답할 말이 좀더 자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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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된 애도, 그리고 촛불혁명

이 영화는 국민경선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던 민주당의 2002년 대통령선거를 다룬다. 한편으로는 잘 몰랐던 노무현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지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시민들이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다. 동서분열, 색깔론, 음모론을 조장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언론 및 구태 정치세력의 존재양상도 잘 부각됐다. 그리고 이런 '적폐'와 싸워 천신만고 끝에 승기를 잡은 자의 의로운 패기와 외로움, 솔직함 등은 '인간 노무현'의 매력 자체만큼이나 그것을 알아본 시민들에 의해 비로소 정치적 가치가 될 수 있었다는 점도 잘 조명됐다. 영화는 성공서사로 끝나지 않는다. 대통령 당선 장면에 이어 스크린을 채운 장면은 노란 꽃으로 헤드를 장식한 노무현 대통령의 운구차 행렬이다. 그리고 영화의 결미는, 장대 소낙비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조문 대열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 시민들에 대한 오마주로 채워진다.

관객은 여기서 비로소 애도를 끝내지 못한 채로 8년 세월을 버틴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정작 나 자신은 그때 거리에서 조문하지는 못했다. 어느 비 내리는 저녁 버스가 봉은사를 지나칠 때,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의 출입을 금함"이라는 검은 입간판을 발견하고 절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 조문행렬에 숙연해지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많은 관객들이 영상 속 조문객의 오열을 보며 영화관이라는 장소성을 망각한 채 오열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이 순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애도는 특이하게도 떠나간 대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분노와 슬픔으로 항의했음에도 억압당해온 가치들과, 선과 정의가 배반당하는 우리의 아픔에 오불관언했던 세력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촛불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정권교체로써 완수된 듯하지만 사실 감정은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개의 애도가 완수되어야 마음 깊숙이 고인 멜랑꼴리와 결별하고 건강한 정치성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애도를 '정치'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가 해소해야 할 애도는 대의정치가 완수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여러 면에서 68혁명을 떠올리게 한다고들 말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해 혁명을 완수했고, 풍자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68혁명과 비견될 만큼 탈중심적인 성격이 뚜렷했던 것은 사실이다. 실상 68혁명은 정부와 경찰의 폭력에 항거하는 시민의 편에 언론이 가세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유혈 혁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체의 폭력 없이 평화롭게 완수된 촛불혁명은 서구적 보편성의 측면에서 우리 역사가 가진 취약성을 스스로 극복했다는 자부심도 갖게 했다. 그러나 68혁명이 무엇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투쟁이었고, 주체의 저항들이 엄청나게 다양하게 진술된 역사였다는 점을 돌아볼 때, 촛불혁명은 준비된 구호를 충실히 따랐던 '착한' 혁명이었다는 한계 아닌 한계도 존재한다. 불 꺼진 청와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질렀던 함성에는 분명 준열함이 서려 있었지만 그것은 저항의 언어라기보다 '이게 나라냐' 하는 위기의식으로 수렴된 공통의 언어였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인문학적 저항과 시민의 정치

그런 점에서 우리의 요구를 일차적으로 관철시킨 지금이야말로 68혁명의 활기가 해방시켰던 모든 억압된 상상력을 헤집을 적기가 아닐까싶다. 분명 촛불혁명은 우리 삶의 한 축을, 특히 정치적 경험의 한 축을 지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촛불혁명은 세대론의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었지만, 4·19를 경험한 조부모 세대와 87항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에 이어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촛불세대'로서 자신을 역사적 주체로서의 인식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정치'를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해가고자 하는 '새로운' 시민에게 정치권도 다르게 반응해야 할 것이다.

성장하는 시민에 비하면, '정치'가 소외시킨 것은 어마어마하다. 참정권은 의무가 없이도 주어지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지난 회기에 18세 선거권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 역시 대입전형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개혁 공약이었다. 어느 누구도 대학개혁이 우선하면 고교입시 제도의 개혁이 뒤따를 수 있다는 발상을 내놓지 못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대학사회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 자정 능력이 결여돼 있다. 그러나 대학개혁은 사학법 개정 같은 외부의 제도로만 이루어지기 어렵다. 대학교육의 주체들 각자의 수준에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외들을 포함하여 교육의 본질적 가치에서 학생들 자신이 소외되는 현실이 개선되어야 한다. 대학사회의 임노동은 사회적 기회비용과 사회적 임금(social wage)이라는 차원에서, 대학의 본질적인 가치는 학문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인문학적 저항을 시작할 때다. 말하기의 봉인 해제를 시작하는 것, '적폐청산'을 '큰 정치'에 맡길 것이 아니라 소규모의 삶에서 피부로 느껴지도록 실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차가운 제도의 언어들에 뜨거운 우리의 호흡을 입히는 작업이 '인문학적' 정치일 수 있다. 그때 정치는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