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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칠까, 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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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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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이었다. 사법연수원 동기인 부장검사가 부친상을 당했다. 조문을 갔더니 문상객들이 많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린 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어디서 본 듯한 중년 남성 한 사람이 장시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빈소 안으로 바로 들어가 버렸다.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 누구지?' '몰라서 물어? 헌법기관의 장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기다리는 사람들 안 보이나? 헌법기관의 장이면 다야? 저렇게 새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니 그 기관 못 믿겠군.' 필자의 귓가에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소위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1주일이 되었다. 이 법이 발효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게재된 신문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ㅁ일보의 기사다. 제목은 이렇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식당폐업 속출, 서빙직 줄줄이 쫓겨나... 서민 일자리 직격탄'. 내용을 보니,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관가, 언론사, 주요 기업이 밀집한 곳의 음식점들이 폐업을 하거나, 직원의 수를 줄이고 있어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제처 누리집(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김영란법'의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약칭은 '청탁금지법'으로 되어 있다. 법의 내용을 보면, 금지되는 것은 '모든 청탁'이 아니다. '부정한' 청탁만이 금지 대상이다. 즉, 이 법은 '부정청탁금지법'이라 불려도 무방한 법이다. 또한 이 법 제1조에 의하면, '이 법은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청탁 및 공직자 등의 금품 등의 수수(收受)를 금지함으로써 공직자 등의 공정한 직무수행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다시 아까의 기사로 되돌아가 본다. 기사의 제목에 나타난 '김영란법'을 '부정청탁금지법'이라 바꾸어 읽어 본다. '부정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식당폐업 속출, 서빙직 줄줄이 쫓겨나... 서민 일자리 직격탄'....

놀랍다. 부정한 청탁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했더니, 공직자의 공정한 직무수행을 보장하려는 법을 마련했더니,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려는 법을 만들었더니, 폐업하는 식당이 속출하고, 서민의 일자리가 없어져 버렸단다. 서민의 생존권이 위협받는단다.

실망을 넘어서 충격적이다.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부정한 청탁을 막으면 서민의 삶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로 반칙이 일상적인가? 정말로 우리나라는 반칙이 없으면 안 되는 사회라는 말인가? 대한민국은 공직자 등이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거나, 국민이 공공기관에 대해 신뢰를 가지면 안 되는 사회가 되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썩어버린 사회라면 고쳐 쓰기보다는 엎어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헌법기관, 관가, 언론계, 주요 기업이라는, 권력이나 재산을 가진 이른바 사회의 상층부가 이렇게 반칙이 없이는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썩었다면 말이다. 비록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악취가 진동하더라도, 아직까지는 고쳐 쓸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일까? 엎어야 하나, 고칠 수 있나? 선택하기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고쳐 쓰든, 엎어 버리든 반드시 솎아내야 할 자들이 있다. 거리낌없이 반칙을 저지르는 자, '부정청탁금지법'을 폄훼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다. 이들은 우리 공동체의 암적 존재다. 이제는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살아 보고 싶다. 고쳐진 나라든, 엎어져서 새로 세워진 나라든 간에.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