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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도서 추천] 자연스러운 일, 사소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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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신시아 인로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의식하자. '사소한'이라는 말을 주의 깊게 보라. 이 두 표현은 당신이 열고 싶은 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다."(<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는가?> 가운데)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일, 사소한 일은 없다는 말이다. 성큼 다가온 가을, 3040세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넘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줄 몇 권의 페미니즘 도서를 소개한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답답함을 해소해 줄 페미니즘 입문서부터 우리 삶을 조건 짓는 구조에 질문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따라 읽는다면 페미니즘의 방대한 스펙트럼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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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으로 시작해보자. 이 책은 훌륭한 페미니즘 입문서이자 페미니즘이 어떻게 경력 단절 여성의 삶과 만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긴장감 넘치는 에세이다. 결혼 후 육아와 가사에만 집중하다보니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고 느끼게 된 전직 저널리스트 스탈은 어느날 모교로 돌아가 페미니즘 고전 수업을 청강하기로 결심한다. 스탈은 수업을 통해 읽은 참고문헌을 자신의 삶 속에 녹여내고, 이를 통해 페미니즘 고전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책은 그 일련의 과정과 사유의 진척을 담고 있다. 일본의 여성 연예인이 대학원에서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수업을 들으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역시 같이 읽을 만하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만학도가 어떻게 페미니스트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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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 영문학자인 벨 훅스가 쓴 사랑에 관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에세이 <사랑은 사치일까?>. 그는 "여자는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맬까?"라는 흔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여성의 몸, 연애, 자존감, 성관계, 모성, 자아성취 등의 주제를 통해 '사랑'에 접근하고, 이것이 어떻게 가부장제의 성별위계 및 권력관계와 연결되어 있는지 유려한 문체로 탐구한다. 그리하여 결국 새로운 파트너십에 대한 상상력과 실천으로까지 나아가는데, 연구자이자 활동가이며, 한 명의 여성으로서 그가 이끌어온 삶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페미니스트로서 벨 훅스의 고민과 학자로서의 연구 궤적을 맛보고 싶다면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를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견고한 성별 이분법에도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것에 도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 여성이자 레즈비언인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무법자>는 이 난해한 질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연극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그녀의 위트와 예술가적 감수성이 살아있는 매혹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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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 역시 놓치기 아깝다.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이라는 부제와 함께하는 이 책은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경험되며 타자화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웬델은 비장애인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몸에 대한 이론이 장애인의 지식을 반영하지 않았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비장애인 중심의 페미니즘에 '장애'라는 관점을 도입하고, 장애학에 '젠더'라는 시각을 가져와 인간과 장애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킨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이야기를 담은 홍은전 작가의 <노란 들판의 꿈>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경험과 감각이 만들어낸 글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관점을 경제와 역사로 돌려보자.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제목 그대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관계와 역사를 탐구한다. 미즈는 이 책에서 '가정주부화'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가부장제는 여성을 사적 영역에 가두고 가정주부로 만들어 여성 노동의 가격을 후려치기 해왔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책들에 비해 쉽게 읽히지는 않겠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어렵다면 미즈가 그의 페미니스트 동료인 베로니카 벤홀트-톰젠과 함께 쓴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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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여성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고 할 만한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도 추천한다. 여기서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에도 임금을!'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페미니즘은 종종 부르주아 여성들의 밥그릇 싸움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그런데 사실 페미니즘이 해 온 것은 밥그릇 싸움 이전에, 밥그릇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말하자면 '남성만 쓸 수 있는 밥그릇'을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밥그릇'으로 재구성하려는 운동이었다는 의미다. <혁명의 영점>은 이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해 온 페미니즘의 한 흐름을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독자가 되는 일은 저자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과 살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신시아 인로의 말이다. 여러분 앞에 가슴 벅차는 대화의 장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