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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씨의 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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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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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은 직업병이다"

5월 26일, 서울고등법원 판결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이기길 바랐던 사건. 1심에서 지고, 2심에서 뒤집었습니다. 최종 변론할 때 분위기가 좋아 어느 정도 기대는 하면서도 끝까지 마음 졸였는데, 소식 듣고는 눈물이 나더군요.

1심에서 졌을 때 정말 미안하고 분했습니다. 판결문을 보고는 더 참담했죠. 재해자 입증책임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판에 박힌 판결. 공단의 조사 잘못, 회사의 자료 은폐 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어떻게든 2심에서 뒤집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심 재판부가 또 심상치 않았습니다. 재판장이 그러더군요. 지금 원고 측이 주장하는 요인들이 다발성경화증을 일으킨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들고 오라고. 논문 말고 교과서 같은 걸 가져오라고. 갑갑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었죠.

다행스럽게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랑 삼성 등이 법원이 요청한 자료제출을 늦게하거나 거부하면서 재판은 길어졌고, 그 사이 재판장이 바뀌면서 이후의 재판 진행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종 변론을 PT로 하겠다는 요청을 받아준 것도 감사했고, 그 PT 변론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음에도 끝까지 경청해주어 감동스럽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26일, "제1심 판결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너무 다행입니다. 지금도, 정말 기분 좋습니다.

'다발성경화증'은 중추신경세포에 다발적 손상이 일어나는 질환으로 10만명당 3.5명 정도가 발병하는 희귀질환입니다. 그 병이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만 네 명이 확인되었습니다. 올해 2월 서울행정법원이 삼성'LCD' 노동자(김미선 님)의 다발성경화증을 처음 산업재해로 인정했습니다. 그에 이어 서울 고등법원도 삼성'반도체' 노동자(이소정 님)의 같은 병을 산재로 인정한 것입니다.


2.

2013년 4월경 녹색병원에 입원 중인 소정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 공장과 자신의 일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소송 결과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변호사가 미덥지 못했던 탓도 있었을 겁니다. 왜 아니겠어요. 이제 막 변호사가 되고 반올림 활동가가 되어, 외계어 같은 반도체 공정 용어들을 처음 접하던 때였으니 누가 봐도 그랬을 겁니다. 그래도 소정 씨는 차근차근 잘 설명해 주었고, 그때의 '교육'이 다른 소송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병원을 몇 번 찾았는데, 어느 날은 좁은 침상에 반도체 공정과 질병에 관한 자료들을 잔뜩 늘어놓고 연구하고 있더군요. 문득 왜 그렇게 산재인정 받고 싶은지 물었고, 그때 소정 씨의 답변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요"

소정 씨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갔고, 학비가 마련되자 공장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그해 4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려졌습니다. 정확한 병명을 찾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이 병이 워낙 그렇습니다. 증상도 다양하고 이 병을 잘 아는 의사도 많지 않아, 진단을 받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의사들은 아직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커녕 치료 기술도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증상을 약화시키는 약물을 투여할 뿐인데, 그로 인한 부작용이 또 많습니다. 소정씨는 그렇게 10년 넘게 투병 중입니다. 하반신 마비와 잦은 강직, 시력 저하 등을 겪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직.업.병이 아니면 개.인.질병이 됩니다. 업무와 무관한 유전적 요인, 생활 습관 등이 병을 유발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당사자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직업병 피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에게 개.인.질병이라는 말은 곧 '네 탓'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산재보상이 필요한 이유는 결코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소정 씨에게는 소송을 포기할 수 없었던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정 씨가 제게 누차 강조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내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소정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의 2년여 동안, 자랑스러웠다고 합니다. 삼성에서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도 했었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 공장에도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 중에 자신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지 않겠냐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반올림과 함께 하는 대부분의 직업병 피해가족들이 비슷하게 갖고 있습니다. 황상기 아버님도 또 다른 유미 씨가 나오지 않길 무엇보다 바라고 계십니다. 그 마음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반올림을 만들었고, 그 간절함이 반올림의 지난 10년을 견인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3.

이번 판결은 내용도 좋습니다. 특히 산재보험법상 '상당인과관계' 판단 법리에 대한 아래 내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희귀질환' 사건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근로자의 질병이 희귀질병이어서 임상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작업현장에서 발병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적·자연과학적 기술 수준이나 성과에 비추어 현저히 곤란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만연히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현 단계에서 의학적·자연과학적 연구성과 등을 바탕으로 하여 근로자의 업무 전 건강상태, 구체적 업무형태, 발병 시기 등을 고려하고, 여기에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함으로써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취지와 손해로 인한 특수한 위험을 적절하게 분산시켜 공적 부조를 도모하고자 하는 사회보험제도의 목적 및 사회형평의 관념 등을 고려하여 그 인과관계의 유무를 규범적 관점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상병 등과 같이 발병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희귀 질환의 경우에도 현재의 의학적․자연과학적 연구성과 등을 통해 그 질병의 발병 또는 악화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이 근로자의 업무환경에 존재하고, 근로자가 정상적인 업무수행과정에서 그러한 발병원인들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근로자에게 질병의 원인이 될 만한 다른 건강상의 결함이나 유전적인 요소가 밝혀진 바 없고, 업무수행 중 또는 업무수행 직후에 그러한 질병의 증상이 비로소 나타났다면 일응 근로자의 재해와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추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산재소송에서 재판부를 향해 간곡하게, 때로는 판사가 지겨워하는 것을 감내해 가면서까지, 거듭 거듭 강조해온 주장이 이것이었습니다. '산재보험제도의 취지'를 고려하여 '규범적' 판단을 해달라는 것 말이죠.

이 밖에도 2013년 노동부 안전보건 진단 결과(삼성반도체 공장의 관리 실태가 엉망이라는 취지)가 처음 거론 된 것, 최종 변론 직전에 정리해서 제출한 관련 논문·노출 물질 목록이 그대로 판결문 별지로 첨부된 것, 공단의 재해조사 당시 삼성이 제출한 작업환경 측정 결과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 등이 인상적입니다.

4.

이번 사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은 또 상고를 고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제발 그러지 말길 바랍니다.

소정 씨 사건에서도 공단 측 재해 조사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소정 씨는 좁은 공간에 여러 공정이 밀집되어 있는, 그래서 수십여 종의 화학제품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업무환경에서 일을 했는데, 공단은 그런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삼성이 제출한 '작업환경측정 결과표'를 버젓이 보고서에 실었는데, 누가 봐도 어설프고 부실한 그 자료에 대해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추가 조사를 벌이지도 않았죠.

법원이 강조한 '규범적' 판단이란 이러한 공단의 조사 잘못에 대해서도 법률적 평가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공단은 지금 상고 여부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 소정 씨를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할 때입니다. 조사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이죠.

그리고 공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길어질지 예측조차 어렵다는 것을요.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고된 사람을 기약 없는 법정 투쟁에 또 몰아넣지 마세요. 제발요.


5.

이번 사건에서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끔씩) 이기는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번 승소 판결도 반올림 운동의 성과입니다. 반올림의 지난 10년 투쟁이 없었다면, 이러한 판결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느리지만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판결이 그 작은 징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