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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Headshot

면접관들에게 자연 다큐멘터리를 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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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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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영혼공작소] 성 고정관념

"카이스트에도 여학생이 많나요?"

종종 받는 질문이다. 거의 40% 가까이 된다고 하면 놀라면서 여지없이 물어보는 다음 질문. "전공 수업을 잘 따라가긴 하나요?"

"아마 여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더 높을걸요?"라고 대답하면 이내 말끝이 흐려진다. "여학생이 자연대나 공대에서 전공 공부 따라가기 힘들 텐데."

로런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학교 총장은 "여성이 수학이나 물리학 등 기초과학을 못하는 이유는 유전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해서 총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현실은 그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여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남학생을 따라잡은 지 오래다.

물론 이제 새로운 핑계를 대는 분들도 있다. "여학생들이 성실해서 그래. 남학생들은 유혹이 많잖아. 게임에 빠져 있는 애들이 부지기수이고, 요즘처럼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하면 성적이 주저앉는다고!" 하지만 예전에도 게임은 있었고, 올림픽은 열렸다. 그 당시 여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남학생들에 비해 더 낮을 때에는 '선천적으로 여학생은 수학은 못한다'고 하다가, 이제는 남학생들을 유혹하는 세상 탓을 한다. 이처럼 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참 벗기 힘들다.

'어머니' '누나' 대 '베이브' '빔보'

미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 남녀 학생 한 무리가 교실로 들어가자, 실험자가 실험에 관해 간단히 설명한다. "이 실험은 남녀들 간에 수학적 능력에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30분입니다. 앞에 놓인 수학 문제들을 모두 최선을 다해 풀어주세요."

모집된 남녀 학생들이 평소 학교에서 받는 수학 점수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이 실험에서 실제로 여학생들이 얻은 수학 점수는 형편없이 낮았다. '수학적 능력의 성 차이에 관한 연구'라는 말에 여학생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연히 남학생들의 성적은 올랐다. 이처럼 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남녀 모두에게 존재하며, 놀랍게도 고정관념이 실제 인지적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우리의 뇌는 고정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 여성은 모성적이고, 흑인 남성은 공격적이며, 유대인은 지갑을 절대 열지 않을 거라는 성적·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아저씨는 뻔뻔하며, 요즘 애들은 버릇없고, 나이든 노인은 성욕을 잘 다스린다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 직업에 대한 편견도 만만찮다. 예술가는 섬세하고, 정치가는 권모술수가 능하며, 교수는 논리적으로 따지고, 사업가는 통이 크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다. 평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여지없이 우리의 뇌에서 이런 고정관념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스키마', 그러니까 뇌가 정보를 여러 범주로 조직화할 때 이용하는 기록체계의 일종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정보들 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일찍 내리는 데 꽤 도움을 준다. 우리 주변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을 판단할 근거는 늘 충분하지 않다. 평소 경험이나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통념은 우리가 상황을 판단하는 데 정보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문제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의지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종종 있다. 연약한 아줌마, 정중한 아저씨, 예의바른 청소년, 성적 욕구가 강한 노인, 정직한 정치가, 대범한 교수, 섬세한 사업가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다.

세상의 모든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광고기법은 이 '고정관념의 점화'다. 우리는 예쁜 여성의 사진을 본 후 화장품을 바라보면 '내가 저 화장품을 바르면 예뻐질 것처럼' 생각한다. 멋진 남자가 가만히 웃는 모습만 봐도, 그다음에 본 제품에 대한 호감이 절로 생긴다. 앞에 제시한 자극이 다음 사건을 판단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광고가 고상한 현대 남성들에게 끼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 실험이 있다. 두 집단의 남성에게 텔레비전 광고를 보여준다. 한 집단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린 성차별적인 광고를 보여주고, 다른 집단에는 성적인 표현이 전혀 없는 광고를 보여준다. 그런 후에 피험자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련의 문자열이 무슨 단어인지 판단하는 과제다. 흥미롭게도, 성차별적인 광고를 본 남성들은 다른 집단의 남성들과는 달리, '어머니' '누나'처럼 모욕적이지 않은 단어보다 '베이브'(babe), '빔보'(bimbo, 아름답지만 우둔한 여자) 같은 성차별적인 단어를 더 빨리 알아채렸다. 즉 광고가 여성이라는 스키마를 '성적인 대상'으로 점화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0.2초 만에 매력 있나 없나 판단

더욱 심각한 것은, 광고를 통한 고정관념의 점화가 실제 생활에서도 남성들의 태도를 바꾸어놓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광고를 본 후 여성 구직자를 면접하도록 실험했다. 이 면접에 광고가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묘사한 광고를 본 남성은 다른 집단의 남성들에 비해 여성 구직자들에게 더 바싹 다가앉았고, 더 많이 치근덕거렸으며, 성적으로 부적절한 질문을 훨씬 더 많이 던졌다. 여성 구직자 앞에서 남성 면접관은 마치 '제 짝을 찾는 수컷처럼' 행동했다.

성차별적인 광고는 여성 구직자에 대한 남성들의 기억과 자격평가능력 또한 편향되도록 만들었다. 성이 점화된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적 외모는 많이 기억했지만, 업무 적합성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별로 기억하지 못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나중에 여성 구직자들의 능력을 판단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 남성 면접관들은 '여성 구직자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업무 적합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성들이 다른 집단의 남성들보다 여성 구직자의 채용을 추천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성이 점화된 남성들이 그렇지 않은 남성들보다 여성 구직자들을 더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함께 일할 동료,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뽑은 것이 아니라 '교미를 할 가능성이 높은' 성 상대자(mating partner)를 뽑은 것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우리는 외모가 매력적인 사람은 좀 더 착하거나 능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매력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승진도 더 빨리 하고, 회사에서 인정도 더 쉽게 받으며, 재판을 받더라도 형량이 적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치원 아이들도 예쁜 선생님의 말을 더 잘 듣는다니 말 다 했지!

사람의 얼굴을 판단하는 데 우리 뇌에 필요한 시간은 약 0.4~0.6초. 우리는 이 짧은 시간에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0.2초. 다시 말해 그가 누구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우리 뇌는 상대방의 매력도를 알아채는 것이다. 소개팅 자리, 맞선 자리에서 그녀가 매력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1분이나 10초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외모라는 기준에 대해서만.

정글에서 생활하는 원시인들에겐 유익했을, 이 빠른 판단 능력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종종 잘못된 판단을 야기한다. 기업 채용 때 면접관의 뇌에선 모든 이성 구직자를 바라볼 때 이 회로가 암묵적으로 작동하며, 유권자가 정치가를 뽑을 때, 학생이 선생님을 바라볼 때, 심지어 성직자가 신도를 대할 때도 이 회로는 여지없이 작동한다.

물론 유권자나 학생, 성직자에게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의 최소한의 양심은 마음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고, 그럴듯한 대답을 마련하게 한다. 남성 면접관은 매력적인 이성 구직자에게 그럴듯한 채용의 이유를 붙여준다. "우리가 맡길 업무는 고객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업무인데, 나는 왠지 이쪽 사람이 더 사회적일 것 같아"라거나, "입사 서류를 보니 엄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 같군. 우리 기업 문화에 더 잘 맞을 것 같아" 등등의 이유를 대서 결국 예쁜 그녀를 뽑는다.

"아버지 뭐 하시노?" 묻는 내밀한 욕망

이 일련의 실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세상 모든 면접관의 뇌에선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한다. 그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세상 모든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층위의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면접관은 암암리에 직무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사람들을 뽑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고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교수는 이런 이유로 학생을 뽑는 건 아닌지, 성직자는 이런 이유로 신도를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면접 상황에서 누군가는 마지막 선정회의 때 총대를 메고 이 문제를 한번 더 제기하고 토론해야 한다. "혹시 우리가 이 사람을 뽑은 이유가 외모 때문은 아닐까요?" 하고 말이다. 그러면 채용에서 업무에 더 적합한 사람들을 뽑는 데 좀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뇌가 갖는 원시적 고정관념을 재고할 수 있는 지성을 가져야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성직자와 신도의 관계가 제구실에 충실하게 된다.

"아버지는 뭐 하시노?" 영화 <친구>의 그 선생님은 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우리 뇌는 고정관념이라는 편리한 판단기준을 사용해 사람을 미리 재단한다. 그의 성별, 인종, 출신 지역, 가정환경 등을 통해 쉽게 일반화한다. 그 안에는 우리의 내밀한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런 오류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광고 실험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해보자면, 면접 전에 면접관들에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오션 월드>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자. 그러면 그들이 매우 진지한 태도로 면접에 임할 것이다. 단, 물개가 교미하는 자연 다큐멘터리는 빼고 말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