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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공서열'이라는 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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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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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사가 중앙지검장에 임명됨으로써 그보다 먼저 사시에 합격한 40명 이상의 고위 검사님들이 거취를 고민 중이라고 한다. 상당히 어처구니없어하며 그런 기사들을 읽다, 과연 우리 사회에 기수나 나이에 상관없이 순전히 실력으로만 평가 받는 분야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자영업계를 제외하고는 예능계가 거의 유일하게 거기서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고, 스포츠계 정도가 그 뒤를 잇지 않을까 한다.

유교적 도덕의 기본인 이른바 오륜 중의 하나인 '장유유서'라는 원칙은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런데 모르긴 해도 서구식 근대화를 이룬지 100년이 훨씬 넘은 일본이나, 특히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겪은 중국에는 이 유습이 상당히 엷어졌을 것이다.

유독 한국(아마 북한도)에 강하게 잔존하는 이 유습에 물론 윗사람을 공경하여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긍정적인 면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정보량이 제한적이었을 전근대 사회에서 인생의 경험이 제일 덕목이었다면, 새로운 지식 체계에 발맞추기도 힘든 현대 세계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젊음이 큰 무기일 수 있다. 열심히 일하다 후대에 자리를 내주고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노년의 삶이 분명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검찰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연공서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시대착오적인 적폐임이 분명해 보인다.

사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계나 교수 사회만 해도 이미 그 적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어서 반갑다. 연구와 교육 업적이 중시되어 그 결과에 따른 과실에도 연차와 무관한 차등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젠 연공서열이 전가의 보도인 시대는 먼 옛날의 얘기다.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업적이 부족한 원로급들이 오히려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격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그 사회에서 연장자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내가 긴장을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고, 그런 상황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검찰이니 서로 간에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기수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인사권자의 어쩔 수 없는 정치성 때문에 어느 정도 평등이 보장되는 그 장치가 그 사회에서는 나름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도 공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할 검찰에서 실력이나 노력보다 기수가 우선이란 사실이 너무도 이율배반적이고 희극적이다. 오랜 관행을 깨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걸 당연시 해왔던 언론 등 세간의 인식도 큰 문제이고. 그러니 무리한 기소나 봐주기 기소가 횡행해도 무풍지대일 수밖에 없었겠지.

이제 제발 한국에도 나보다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하는 후배 밑에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문화가 조금씩이라도 정착되어 가면 좋겠다. 쉽지 않겠지만 이번 검찰의 기수 파괴가 한국 상류사회의 연공서열 중시 풍토를 깨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