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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속삭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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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광진 박사(러시아문학자)

1945년 스탈린은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2차대전은 세계사적으로 파시즘에 맞서 유럽과 아시아를 해방시킨 의미를 지닌 전쟁이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2차 대전은 이후 "조국전쟁"이라는 이름도 모자라 "대조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당시의 소련 사회는 물론 오늘날 러시아의 국민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첫 번째 '조국전쟁'은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이다).

올해 2016년 5월 9일에도 러시아는 2차대전 승전기념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당연 승전 71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이었다. 열병식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장소인 붉은 광장에서 행해지는데, 올해에도 육해공의 최신 무기와 군인들이 러시아의 위력을 과시했다. 특히 올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차대전에 참가해 다리 부상을 입었던 자신의 부친 사진을 들고 시민들과 함께 행진하는 퍼포먼스도 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2차 대전 승전 기념일은 가장 큰 국경일이자, 러시아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애국심 고취의 중심에 푸틴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지만, 최초에 그 자리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위대한 전쟁(그것도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있었다. 더 정확히는, 최소한 그런 이미지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의 문서와 영상 기록물들은 살펴보면 스탈린에 대한 소련 국민들의 지지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극장을 운영한 감독이자 연출가였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 스탈린은 독재자였고, 또 학살자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른바 '대숙청'에 의해 증명된다. 대숙청의 시작은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M. Kirov)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934년 당시 당시 레닌그라드(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의 공산당 제1 당서기로, 대중적인 인기와 지명도가 나날이 높아지던 차세대 리더였다. 어느 날 스탈린은 키로프를 모스크바의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스탈린은 그와 즐겁게 식사를 했으며, 소문에 따르면 '키로프 당신이 소련을 이끌 차기 리더'라는 암시도 강하게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키로프를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역까지 배웅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키로프는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겉으로는 좌파 성향 청년 당원들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배후가 스탈린이라는 점은 모두가 짐작한 바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도 곧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레닌 사후 스탈린과 권력 투쟁을 하던 경쟁자들이었다. 죄목은 테러 모의였다. 그러나 실제 그들은 소련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던 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웅이었으며, 혁명 후에도 소련의 공업화와 농업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자 그룹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스탈린의 경쟁자는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멕시코로 망명해 있었기에 당시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그도 결국에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 이후 스탈린의 피의 숙청을 계속됐으며, 특히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숙청은 극에 달했다. 이 당시 숙청을 '최전방'에서 실행했던 조직은 체카(Cheka)의 후신이자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내무인민위원회는 무자비하게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심지어 내무인민위원회의 조직원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내무인민위원회를 이끌었던 야고다와 예조프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그들이 숙청의 비밀과 성격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때'에 그들의 입을 영원히 닫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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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함께 걷고 있는 숙청 전의 니콜라이 예조프.
그에게는 '피의 난쟁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예조프가 숙청된 이 사진에서 그의 모습이 지워졌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대숙청의 범위는 전방위적이었다. 이로 인해 원로 볼셰비키들, 즉 유력한 혁명 영웅들과 동지들이 대부분 숙청되었다. 자신의 지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수 있었던 당의 고위 간부들과 경쟁자 대부분이 제거되었다. 거의 모든 기관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데, 가령 군부의 경우 101명의 당시 사령관들 중에서 91명이 숙청되었다(이 노련하고 유능한 장군들의 숙청으로 소련은 2차 대전 참전 직후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비밀경찰 자신들도 2만 명 이상이 숙청 당했다. 일반인 역시 '외적 특성(그는 실제로 히틀러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다)'이나 '풍속 교화' 등의 이유로 숙청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학자들에 따라 적게는 160만 명, 많게는 700-800만 명이 처형되거나 투옥되고, 혹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숙청의 결과,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시작되었다. "스탈린 동지의 말은 옳다"라는 스탈린 무오류설도 등장한다. 그의 이미지는 인자하고 현명한 아버지로 포장됐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여야 할 스탈린은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되며, 그의 사진이나 그림은 이제 '존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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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존영'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대숙청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스탈린과 함께 숙청을 집행한 기관인 내무인민위원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다음으로는 과잉 충성을 받친 하급관리 그룹을 들 수 있다. 가령,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는 모스크바 크렘린(중앙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지난번에 할당한 1500명에 대한 숙청은 모두 수행하였습니다. 다음에는 할당량을 더 높여주십시오."

시민 자신들 또한 대숙청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반인들의 '자발적인 협조' 없이는 이 정도의 대규모 숙청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개인 간의 원한 관계를 비밀경찰에게 밀고해 해결하기도 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상 전 국민의 '정보원화'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국민 누구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숙청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이러했을 것이다.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먼저 당하느니 내가 먼저 밀고하겠다." 따라서 대숙청 시기의 사회는 "속삭이는 사회"로 정의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밀고자와 정보원을 피해 '속삭'이는 것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당국에 '속삭'이며 밀고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뒤늦은 2차 대전 참전(1941년)으로 스탈린은 대숙청을 잠시 중단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2차 대전 승리로 당당한 전승국이 되었고 이후 세계 최열강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지만, 이 전쟁으로 소련 군인과 민간인들은 2700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전쟁의 영웅으로, 조국을 구한 인물로, 세계를 구한 인물로 당시에 추앙되었다. 전쟁 이후 그에 대한 개인숭배가 더욱 강화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스탈린 치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세운 나라에서 또다시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러시아학 학자이기 이전에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서, 2016년 5월에 열린 러시아의 2차대전 승전기념식에서 스탈린의 짙은 그림자를 본 것은 나만의 착각이길 간절히 바란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