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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사랑을 배웠어요" |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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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서광진 박사(러시아문학자)

러시아를 정의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문학·문화 연구자들은 <푸쉬킨 공동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 같다. 푸쉬킨은 러시아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살린 시인이자 최초의 전업작가(그래서 가난했던)였으며, 러시아 산문의 기초를 닦은 작가였다. 그는 단연 러시아의 국민문학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푸쉬킨의 시 한 수쯤은 읊을 수 있고 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푸쉬킨의 문학을 즐기는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러시아는 단연 <푸쉬킨 공동체>라 할 만하다. 아울러 문학이 러시아 문화와 사회에서 가졌던 특별한 지위를 생각해본다면 문학연구자들이 이 용어를 선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중에서도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쉬킨이 가장 공들여 완성한 작품(1823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30년에 완성)이자, 러시아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영원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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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이 그린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상화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예브게니 오네긴>은 오네긴이라는 바람둥이와 타티아나의 엇갈린 사랑이야기가 중심이다. 오네긴은 렌스키라는 사내와 타티아나를 두고 결투를 할 만큼 그녀를 유혹했지만, 유혹에 성공하자 타티아나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를 차버린다(전반부). 시간이 흐른 후 타티아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사교계의 꽃으로 떠오른다. 오네긴은 다시 타티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돌아가고자 하지만 이번에는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거절한다(후반부).

오네긴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릴 때 다음과 같이 교육 받았다.

가난한 프랑스 사람 무슈 아베는
아이를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놀이처럼 가르쳤다.

오네긴에게는 모든 것이 놀이다. 남들에게는 뜨거운 사랑도 그에게는 한갓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듯, 오네긴의 정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따분함과 지루함이며, 따라서 그의 인생은 가볍고 지루하다. 그러니 이 따분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연애다. 게다가 그는 하필 연애(놀이)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오네긴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는 서재다. 그의 서재는 의상실이자 장식장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책은 위선적이지만, 동시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서재에서 그는 옷을 갈아입고(멋쟁이), 적어도 세 시간을 화장에 쓴다. 삶이 곧 연기인 것이다. 그는 본성상 모든 것에 빨리 지겨워지는데, 이것이 그의 말대로 하면 '우울증'이다. 그에게는 책-글쓰기-연애(여자)가 모두 마찬가지의 운명으로, 여인들을 버렸듯이 책들도 버렸다. 그렇다면 오네긴의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은 어떤 책들이었던가? 그것들은 계몽주의 서적들이었다. 왜 오네긴은 이 책들에 지겨워졌을까? 19세기 엄격한 탄압정치 하에 살던 상류층 지식인의 전형인 오네긴은 '잉여인간'으로 불릴 만하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지식인들의 일부는 1825년 황제 암살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자(데카브리스트의 난), 지적 패배감에 사로잡혀 집에서 책을 읽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푸쉬킨에게 오네긴은 이런 잉여인간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는 잉여인간!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책(서재)다.

타티아나에게도 책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녀는 (오네긴과 달리) 인생을 장난처럼 사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그녀를 지배하는 것 역시 책이었다. 그녀는 특히 낭만주의 연애 소설들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녀의 '모스크바'에 사는 사촌언니, 알리나 공작영애가 연애 소설이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타티아나에게 모스크바의 사교계는 선망의 대상으로, 그들이 읽는 것이라면 뭐든 따라 읽어야 했다. 타티아나는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그 여주인공처럼 되고자 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상대가 좋아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가 된다.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제대로 된 사람이 나타나기만 해라! 마음껏 사랑해주마! 타티아나는 오네긴에 대한 소문만 듣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러자 가슴 속에서 생각이 싹텄다.
때가 왔고 그녀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영혼은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누군가를.

대상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읽었던 모든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이 오네긴으로 합쳐 들어갔다. 그녀의 오네긴은 실제 오네긴과는 너무 다른 인물이었고, 그녀의 독서 경험이 창조한 인물에 불과하다('책으로 연애를 배웠어요'). 더욱이 실제 오네긴에게 사랑은 그저 놀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타티아나의 사랑은 더욱 거세졌다는 것이다. 이 또한 연애소설에 따라, 스스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연의 아픔을 겪던 타티아나는 그녀의 명명일을 기점으로 극복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다.

그녀의 의지와 이성의 힘으로 이를 극복했다.

더 이상 타티아나는 연애소설을 읽는 소녀가 아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오네긴의 서재를 가서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다.

그녀는 예브게니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이제나마!

그리고 오네긴의 존재 양식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그는 패러디가 아닌가!

이 구절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네긴은 그가 읽은 책을 패러디해서 사는 인물이 아닌가. 그가 읽은 책이 모두 지루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면, 그런데 그것이 그가 세상을 이해한 방식의 전부라면, 그것을 패러디함으로써만 살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책이 빗어낸 인물 아닌가.'

타티아나는 이후 한 장군에게 시집간다. 그녀는 이제 누구와 결혼해도 관계없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그리고 사교계의 꽃이 된다. 그런 그녀에게 예전의 타티아나는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빠지게 된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예브게니는 타니아나에게 어린애처럼 사랑에 빠졌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어린애처럼'이라는 묘사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타티아나를 떠난 후에도 어렸을 때 가정교사에게 배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오네긴의 새로운 (편지)고백에 타티아나는 울면서 "예전의 심장을 지닌 소녀가 되살아났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왜 오네긴이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지 간파한다. 그녀에게는 부와 명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흔들렸지만, 결국 그녀는 오네긴의 사랑을 거절한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난 전 이미 결혼한 걸요...

그녀는 의지와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겨냈으며 높은 윤리성도 보여준다(당시는 한참 늙은 사람에게 시집간 젊은 귀족 여인에게 정부가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또한 타티아나는 오네긴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연기하고 있다고, 즉 패러디 하고 있다고 여겼다. 사랑이나 삶은 책 속에서 읽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타티아나는 이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그녀의 어릴적 유모가 말한대로 '사랑과 결혼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네긴의 두 번째 고백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두 번째의 고백은 첫 번째의 그것과는 달리 진짜 사랑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필자에게도 이 작품이 매번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읽힌다는 것은 한편으로 여전히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우선 하고 볼 일이지만, 작품은 읽고 볼 일이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