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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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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③]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주 업무로 하고 있는 직업의 유형이다. 디자이너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있는 여러 분야에 따라 디자이너의 명함이 바뀐다. 명함에 디자이너라고 쓰여있으면 디자이너가 된 것일까? 디자이너는 무엇을 잘 해야 할까?

전공할 때는 발상, 아이디어, 생각, 크리에이티브 등 창의성 측면에 힘주어 배웠던 것 같은데, 1인 디자인 기업으로 독립하고 보니 소통능력, 납기일 잘 지키기 등 디자인 외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러면, 디자이너의 본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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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잘 해야 디자이너다?

디자이너의 본질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을 잘해야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시각디자이너는 커뮤니케이션에 필요한 다양한 시각자료들을 만들어낸다. 광고, 포스터, 리플릿, 브로슈어 등의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발표자료나 홍보영상 같은 비 인쇄매체의 디자인도 하고 있다. 제품 디자이너라면 대중들이 쓰는 다양한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건축 디자이너라면 건축물의 구조와 동선 등을 감안해 건축물을 디자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반평생을 디자이너로 살았음에도 내 디자인이 만족스럽지 않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했을 때, 나는 디자인을 예쁘게 하는 디자이너는 아니다. 크리에이티브한 작업보다 단순 작업을 더 좋아하고,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디자인보다는 너무 심플해서 '디자인을 한 것 맞아?'라는 생각이 드는 디자인을 선호한다.

나도 한때는 내 디자인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알았다. 1인 디자인 기업으로 독립한 후 5~6년 차쯤 되었을 때는 매너리즘에도 빠졌었다. 디자인에 대한 피드백도 좋았고, 팬처럼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도 생겼고, 납품받은 클라이언트의 성과도 좋았다. 그때의 나는 예술가적인 디자이너였다. 고객에게 내가 하는 디자인이 맞으니 그냥 잠자코 따라오란 식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기도 했고, 내 의견을 무조건 관철시키기 위해 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디자인에 대한 콧대가 하늘을 찔렀던 7년 차 때, 나는 고객 명단을 펼쳐놓고 한분 한분께 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디자인을 그만둡니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었다. 아무리 좋아했던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고, 나의 디자이너 인생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그리고 바로 커피숍(카페)을 창업했다. 정말 뜬금없는 전개이긴 하지만 카페는 오랜 시간 꿈꿔왔던 제2의 꿈이기도 했고, 가족들도 카페를 해보고 싶어 해서 과감하게 회사를 접고 카페를 창업한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만, 카페는 정말 힘들었다. 무엇보다 고객을 대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디자인을 할 때는 회사를 상대했지만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개인고객을 상대하게 되었다. 회사 내 담당자들은 회사 돈으로 나의 디자인을 상대하지만 카페 고객들은 자신의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내가 만든 커피를 상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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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던 예술가적인 마인드는 장사꾼 마인드로 180도 바뀌었다.

커피는 한잔에 3000원 남짓 한다. 3000원짜리 커피를 팔면서 고객이 이 커피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에 대한 고민을 수 없이 했다. 가격이 비싸지는 않은가? 맛은 괜찮은가? 크레마가 다 죽지는 않았을까? 온도는 적당한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고객들에게 난 어떤 디자이너였을까?'

30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팔면서도 고객의 만족을 위해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연구를 하는데, 300만 원, 3천만 원짜리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난 왜 고객에게 고자세를 유지했던 것일까? 내 디자인이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한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디자인은 클라이언트 비즈니스다. 고객이 찾아야 디자이너가 존재한다. 고객이 없는 디자이너는 그냥 배고픈 예술가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디자이너는 장사꾼이어야 한다. 내 디자인을 소비할 시장이 있어야 하며, 그 시장에서 고객이 돈을 내고 구매를 해야만 내 디자인이 가치가 생긴다.

카페를 하며 마인드가 바뀌게 되고 나는 다시 디자인일을 시작했다. 모든 고객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고객과 다른 의견을 말할 땐 항상 대안을 먼저 준비했다. 고객만족이 올라가 재의뢰가 많아졌고, 매출도 매년 상승했다.

디자이너의 본질이 디자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고객이 있어야 디자인도 가능한 것을 생각한다면 디자인의 본질은 고객만족이 아닐까?

GD로 남을 것인가, 디렉터가 될 것인가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GD(Graphic Designer) 형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의뢰한 고객과의 소통을 우선시하는 디렉터형 디자이너.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GD로 시작한다. 나도 그랬고, 내 주변의 동료들도 그랬다. 이 디자인이 담고 있는 내용이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어떤 가치를 전달할지 보다, 예쁘고 멋있는 디자인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 디자인은 고객의 취향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여러 시안을 제시하고 시안 중 고객의 취향에 부합하는 안이 최종 선택을 받는다.

디자인에만 관심 있던 시절, 한 고객사와 전화로 다툰 적이 있었다. 정부기관의 중요한 발표자료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고객의 취향이 너무 독특해서 디자인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내 생각에). 분명히 트렌드에 부합하는 디자인이고, 내가 알고 있던 디자인 이론대로 디자인을 했지만 고객은 너무 확고하게 내 디자인을 부정했다. 결정적인 대화는 이랬다.

(전화 통화, 고객이 전화를 해서 재 디자인을 원하고 있던 상황)

나 : 제가 ㅇㅇ프로젝트도 이런 분위기로 디자인해서 성공했고, 현재 디자인 트렌드는 어떻고.. 블라블라.
고객 : 그딴 건 모르겠고 난 맘에 안 드니까.. 고치기 싫으면 그냥 검은 바탕에 흰 글씨만 써.
나 :.... 그렇게 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요, 그렇게 해서 컨펌이 날까요? 제가 하루 이틀 이 일 합니까?
고객 : 거참 말 많네. 그딴 식으로 말할 거면 들어와서 설명해! 뚝.

고객은 이렇게 소리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시간이 밤 12시가 넘은 상황이어서인지 서로가 감정이 격해져 있었고,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 시절 정부기관 디자인은 대부분 딱딱하고 정적이었다. 하지만 발표하는 내용이 미래지향적인 내용이라 내가 잡은 콘셉트가 좀 트렌디하긴 했다. 고객은 튀는 것 말고 차분하고 심플하게 하라고 주문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의 나라면 여러 대안을 준비해 각 디자인별 효과를 비교하며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피력했겠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내 디자인이 정답인 줄로만 생각했으니까. 당시의 나는 예술가적인 마인드로 똘똘 뭉쳐져 있었으니까.

고객의 취향을 무시한 결과로 난 (적어도 그 고객사에게는) 독선적인 디자이너가 되었고 재의뢰는 없었다. 이후 그 기관의 다른 프로젝트를 경쟁 회사가 진행했던 결과물을 봤는데 매우 정적이었고, 심플했다. 고객의 취향을 맞추기는커녕 대안 제시도 하지 못했던 나는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회비용을 잃었고, 디자이너로서의 신뢰도 잃었다.

지금의 나는 디렉터형 디자이너이다. 디자인의 객관적인 퀄리티를 따지기 이전에 고객과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객의 취향과 원하는 바를 먼저 파악하고 디자인에 임한다.

고객의 취향이 너무 이상해서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이 낮아진다면, 여러 가지 안을 제시하는데 대부분 이런 식이다.

1번 시안 - 고객의 취향에 부합하는 디자인
2번 시안 - 대중들이 좋아하는 디자인(트렌드에 부합하는 스타일일 경우가 많다.)
3번 시안 - 실험적인 디자인

이렇게 시안을 제시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1번 스타일을 선택하지만, 1번과 2번을 믹스해서 조금이나마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많다. 고객의 눈높이는 이런 식으로 높아진다. 자신의 취향이 프로젝트의 성공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번 시안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데 한 번도 안 해본 스타일을 작업하면 공부가 된다.

디렉터형 디자이너는 고객과의 소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디자인하기 전에 질문을 하고, 질문에 대한 이해가 갈 때까지 계속 질문한다. 이 과정을 통해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기도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하면 더 쉽게 디자인을 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정책에 대한 발표자료를 디자인한다면, 단순히 글씨가 잘 보이고, 레이아웃이 깔끔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책이 어떻게 좋은지, 누구에게 좋은지, 이 정책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군지,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군지, 다방면으로 정책을 분석하고, 디자인에 임한다. 정책을 이해하면 그 정책을 텍스트로 표현하면 좋을지, 그림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사진으로 표현하면 좋을지가 결정된다. 사진 한 장으로 설명을 끝낼 수 있는 내용을 텍스트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면 그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 있을까. 이를 디자인 기획이라고도 하는데 단순히 컬러, 서식 등을 정하는 것을 넘어 이해와 소통을 도울 수 있는 디자인 콘셉트를 이끌어내는 단계이다.

고객과의 소통이 필요 없는 디자이너도 있을 수 있다. 소통을 누군가 대신해주는 구조라면 굳이 디자이너가 골치 아픈 소통까지 안 해도 된다. 단, 1인 디자인 기업이나 프리랜서 등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면,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책임지며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소통능력에 대한 고민을 한번 더 해보길 바란다. 소통은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디자인을 이끌고, 재의뢰로 이어져 디자인 사업의 지속성에 기여한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