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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지는 경쟁의 전쟁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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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①]

나는 디자이너이다.

대한민국에서 디자인해서 먹고사는 디자인 산업 종사자이다. 여느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 시절 입시미술학원을 다니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고 대학에 진학해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취직한 지 올해로 15년이 지나고 16년 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준비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디자인의 굴레 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고 있을까에 대해 자주 고민해보는데, 별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잘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2003년 여름 삼성동에 있는 광고디자인 부띠끄에 입사하며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인판은 전쟁터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30만여 명이 디자인산업에서 일하고 있다. 30만 명이 모두 디자이너는 아니겠지만, 디자인이라는 범주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5천만이 넘었으니 30만은 언뜻 보기에 많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산업의 규모가 타 산업 대비 현저히 작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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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에게는 수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이가 들거나 머리가 굳으면 이 전쟁터에서 퇴장(혹은 퇴출)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에 있는 수많은 디자인 대학에서 매년 2.5만 명의 신규 디자이너를 이 전쟁터로 내보내고 있다. 전쟁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그뿐인가, 디자인은 툴에 대한 이해와 디자인 센스만 있다면 얼마든지 진입할 수 있다. 타 산업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에 비전공자임에도 디자이너로 일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오히려 전공자들보다 더 훌륭한 디자인을 뽑아내는 비전공자들도 많다. 내가 일했던 회사에도 비전공 출신 디자이너가 2명이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지금 함께 있던 출신 회사보다 훨씬 큰 디자인 회사의 사장님들이 되어 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몇 년까지 버틸 수 있을까?

대학을 졸업한 뉴비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들어갈만한 회사를 찾게 된다. 대학 때 만들어 둔 포트폴리오를 정리해 책으로도 만들고, 파일로도 정리해 들고 다니며'제가 바로 귀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능력 있는 신입 디자이너입니다.'라고 자신을 어필한다. 구직을 하던 몇몇은 일반 기업의 디자이너로 취업을 할 것이고, 또 몇몇은 디자인 전문회사로 취업을 할 것이다.

수많은 도전 끝에 취직에 성공해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 친구는 그 회사에 몇 년이나 다닐까?

통계에 따르면 국내 디자이너의 근속연수는 4.31년이다.(2012년 기준, 통계청, 2012년 이후는 조사 없음) 물론 평균이긴 하지만 매우 충격적인 수치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명무실해진 사회이긴 하지만 디자이너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말인가 보다. 최소 5~6년, 길게는 10년 넘게 준비해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4년 남짓 일을 하고 퇴사나 이직을 한다는 이야기다. 왜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한 직장에서 일하지 못할까?

나는 총 2년 2개월을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고, 첫 직장에서는 2개월 만에 퇴사했다. 나의 첫 직장은 작은 규모의 광고디자인 부띠끄였는데, 2개월간 내가 했던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기획 : 각종 홍보 브로슈어, 리플릿, 잡지 광고 기획 및 카피라이팅
· 디자인 : 내가 기획한 기획물의 디자인, 로고 디자인
· PT 준비 : 시안 보드 만들기(다행히 PT는 사장이 했다.)
· 인쇄 관리 : 필름 공장, 인쇄공장 돌아다니며 감리
· 납품 : 고객사 대부분이 회사 근처라 납품할 것이 있을 때 직접 납품
· 고객 미팅 : 업무 관련 미팅, 고객응대
· 사무실 청소 : 매일 아침 30분 먼저 출근해 30분간 사무실 및 복도, 계단 청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신입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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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간 일하며 집에서 잔 건 20번 정도 된 것 같다. 눈치 보느라 퇴근을 못한 게 아니라,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안 났다. 금요일에 출근해 다음 주 화요일에 퇴근한 적도 있었다. 작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덴츠 여직원 사망 사건의 주인공보다 더 일했다. 그런데,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회사 동료들도 모두 그렇게 일했고, 비슷한 시기에 취업한 대학 친구들도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

벌써 10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라 현실성이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친구들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디자이너들은 소셜미디어 관리, 영상 및 사진 촬영, 피팅모델 등 디자인 외의 분야도 할 줄 아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만 하고, 박봉에 수당 없는 야근도 여전하다. 디자인 필드라는 전쟁터에 총, 칼도 없이 마우스만 하나 달랑 쥐고 떠밀리다시피 참전한 샘이다.

디자이너는 대부분 이렇게 소비된다. 회사라는 거대한(혹은 작은) 기계 안의 손, 혹은 발에 들어가는 소모품이 되어 쓸모 없어질 때까지 소비된다. 혹은 더 성능 좋고 값이 싼 소모품이 나왔을 땐 쉽게 버려지기도 한다. 신입 디자이너를 선발해 잘 다듬어 국가 디자인산업 역군으로 키워내는 기업의 사회적 윤리를 잘 지켜나가는 회사는 손에 꼽힐 만큼 적다. 또 그만큼 디자인 회사들의 여력이 좋은 상황도 아니다.

회사는 신입 디자이너를 채용해 바로 써먹으려 한다. 신입 디자이너가 일을 배우고 적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결국 비용이니까. 그래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도 경력을 본다. 인턴 경력이라도 이력서에 적혀있지 않으면 이 디자이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냥 일반인일 뿐이다. 대학생들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으니, 대학 때부터 경력 쌓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첫 번째 회사 2개월, 두 번째 회사 1년, 세 번째 회사 1년.
그렇게 나는 2년 2개월 동안 3개 디자인 회사의 소모품이 되어 소비되었고, 2005년 3번째 퇴사를 했다.

그리고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