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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5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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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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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무력하다. 무엇이든 시간이 흘러가면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도 모든 것의 '뼈대'는 세월의 힘을 버텨내어, 본래의 모습을 추측이나마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역사학 전공자로서 우리는 기억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뼈대가 온기 묻은 실체를 온전히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사라진 '살점'을 상상할 수 있는 바탕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더랬다.

기사를 검토 ·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이런 우리의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기억에는 애초부터 세월의 힘을 버텨내는 뼈대 따위가 없었다. 100년 전 일도 아니고 고작 4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인데도, 우리의 기억은 어부가 건져 올린 연체동물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일들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지만, 자세한 사실들은 시간 앞에 무력한 살점처럼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전두환이나 신군부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처럼 뼈대는 남아있지 않느냐고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신문 자료를 살펴볼수록, 우리의 기억에서 떨어져나간 살점들이야 말로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하는 결론에 가닿았다.

『전두환 타서전』은 분명 전두환의 회고록에 대응하는 책이지만, 그를 위해 만든 책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고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돌아보고 또 기억하기 위한 책이다. 그 삼엄한 시대를 거치고서도, 고작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떨어져나간 '살점들'을 잊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을 웃음으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때가 살기 좋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운 좋게 별 탈 없이 그 시대를 거쳐 살아있기 때문에 웃고 말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걸 잊은 채. 그 망각의 틈을 이용하여 누군가는 제멋대로 과거를 '회고'한다. 그 또한 그의 자유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피해자와 소수자에게 어떤 권리와 자유를 주었는가?

신군부가 언론을 통제했고 언론도 신군부에 적극 빌붙어 기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 정도가 어떠했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1980년대 초반의 기사는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아 글자 하나를 해독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일자의 다른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단어 하나 달리 쓰지 않고 일치하는 문장을 수없이 마주했다. 작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씁쓸한 웃음을 참기는 힘들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책에 수록한 기사들은 우리의 기억을 돕는 자료다. 통제된 언론에서 생산한 기사마저도 2017년 특정인의 회고와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 선생인 우리는 사실 하나하나를 암기하고 기억하는 게 역사는 아니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왔다. 지금 와서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을 마음은 없지만,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게 역사의 최소한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전두환 회고록을 보며 처참함을 느낄 이들에게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잊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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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전두환 타서전』(정일영/황동하 엮음, 그림씨, 2017)의 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