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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로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현재를 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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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ZIL PARALYMPICS
ASSOCIATED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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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기> 『미래의 나라, 브라질』,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창민 옮김, 후마니타스, 2016

어느덧 브라질 리우 올림픽도 막을 내렸다(페럴림픽은 이제 시작했다) . 막을 내린 뒤는 항상 썰렁하기 마련이지만, 이번의 썰렁함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주요 경기를 중계하는 시간이 늦은 밤이나 새벽이어서였을까,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로 점철된 스포츠의 인기가 하락해서였을까? 아니면 지쳐버린 한국인에겐 이제 열광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서였을까? 방송국이나 광고주와의 기대와는 달리, 이번 리우 올림픽은 한국 사회에 올림픽 열풍을 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다. 하긴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던 무더위 속에서 올림픽이 열풍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80년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서울 올림픽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국위선양'. 국제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서 전 세계에 '코리아'를 알렸다는 것이다. 촌스럽고 거부감이 드는 논리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찌됐거나 서울 올림픽으로 한국을 알게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3년 전 프랑스 여행 때, 현지인들로부터 '강남스타일' 얘기를 지겹게 들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리우 올림픽을 통해 브라질을 잘 알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올림픽만이 어떤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브라질을 다룬 매체가 한국에 많은 것 또한 아니다. 다행히 타고난 이야기꾼 슈테판 츠바이크가 브라질을 다룬 책 『미래의 나라, 브라질』이 최근 번역되었다. 츠바이크는 자신의 여타 저작에서도 그랬듯이, 브라질의 짧지만 역동적인 역사부터 경제·문화·도시·사람까지 두루 이야기하며 읽는 이를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이제껏 내가 브라질하면 떠올렸던 것은 축구, 삼바, 커피, 포르투갈 정도였다. 올림픽을 개최했어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이 책은 브라질에 대한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문학적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 책의 '뭉뚱그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나 각주를 중요하게 여기는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뭉뚱그림이야말로 이 책의 큰 강점이다. 브라질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브라질의 역사와 문화, 경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나열하기보다는 전체 흐름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허나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다. '츠바이크의 미래'였던 현재, 지금의 브라질을 과연 '미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생각할 때, '미래의 나라'라는 표현은 솔직히 너무 아득하다. 여행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브라질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하는 곳이다. 신문의 경제면에선 몇 년 전과 달리 브라질 경제를 침체나 위기로 표현한다. 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고, 불만이 가득한 시민들은 올림픽 성화를 꺼뜨리려 하거나 봉송로를 막아서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20세기 중반 헛된 망상에 휘둘린 급진적인 지식인의 잡문일 뿐인 걸까? 또 츠바이크는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는 낭만주의자이거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을 남미에 적용한 자기중심적인 유럽인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날 이 책은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우리는 이 텍스트를 20세기 전반기 유럽인이 찍은 브라질의 스냅샷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료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역으로, 츠바이크가 브라질을 통해 보았던 유럽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책 곳곳에서 성찰하는 '문명'이나 '문화', '진보'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물질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안락이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문명의 핵심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살았던 시절, 가장 "완벽한 조직"이었던 유럽의 국가들이 그 조직을 "오로지 야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최근 몇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문명'과 '문화'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문명'과 '문화'를 흔히 생각하듯 '조직화'와 '안락함'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치명적인 오류를 가장 많이 조장한 것은 통계다. 통계는 기계적 지식으로서, 한 나라에서 국민의 부가 얼마나 증가했고, 개인의 수입은 어떻고, 자동차와 욕실, 라디오 수신기는 평균 보급률은 얼마이고, 보험료는 얼마나 되는지 계산한다. 이런 지표에 따르면, 가장 문화적이고 문명화된 국민은 생산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하고, 가장 소비를 많이 하고, 개인당 자산이 가장 많은 국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표들은 정작 중요한 요소를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화와 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척도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가장 완벽한 조직이라도 몇몇 국가들이 가장 완벽한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류를 위해 활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야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현실을 우리는 보아 왔다. (21쪽)

책을 읽다 보면, 츠바이크가 브라질의 밝은 면만 과장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살육을 체계적으로 자행하던 유럽에 좌절한 츠바이크의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텍스트가 가치 있는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잊었던 '상상력'의 중요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단의 상황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자극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는 그의 태도야말로 이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보석이다. "시간보다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평화로운 삶이 과장되고 과열된 역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와 같은 말은 굳이 브라질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상을 실현한 지상낙원의 사례가 아니라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나 신념이 아닐까?

브라질에서는 시간보다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181쪽)

아주 근래 몇 년간의 경험을 보았을 때 그저 조바심과 열망이 부족한 것을, 다시 말해, 진보를 위해 서두르지 않는 것을 단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브라질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평화로운 삶이 과장되고 과열된 역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184쪽)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헬'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태초부터 그랬던 것 같은,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이 시대는 실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츠바이크의 브라질과 현재 브라질 사이의 간극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헬'이 영원한 게 아니라는 희망을 주고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츠바이크를 읽으며, 나는 절망의 시대에 미래를 보는 이를 응원한다. 약자의 입장에서 혐오에 저항하는 이를 응원한다. 무언가를 바꾸려 행동한다는 그 이유로 급진주의자라 불리는 이를 응원한다. "올림픽이 끝났다"고 얘기들을 하지만, 여전히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페럴림픽에 참가 중인 선수들을 응원한다. 역사가 현실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때로는 역사를 잊을 필요도 있다. 현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역사가 없는 사람, 혹은 많이 양보해서, 아주 근래의 역사만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더 브라질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170쪽)

* 이 글은 <서강학보>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