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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28일, 챔피언은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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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HAMMAD ALI
Stringer .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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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스포츠맨이라면 누구를 꼽을 것인가. 좋아하는 종목에 따라, 연령과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이긴 하겠지만, 나로서는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를 꼽고 싶다.

불패의 신화를 안고 은퇴했던 로키 마르시아노와는 달리 몇 번씩이나 패배의 쓴잔을 마셨고, 헤비급 타이틀을 25차나 방어했던 조 루이스에는 방어 횟수에서 훨씬 못미친다. 축구의 펠레처럼 정부의 공직을 맡는 등 화려한 은퇴 후 생활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의 스포츠맨으로서의 기량과 전적에 더하여, 1967년 4월 28일, 그가 보여 준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면서 기라성같은 세계의 강자들을 무너뜨리고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씩이나 차지했던 '떠벌이' 알리에게 이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였다. 로마 올림픽 금메달을 따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했건만 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식당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올림픽 금메달이건 뭐건 클레이는 주먹이 남들보다 센 검둥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한 클레이는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쓸모가 없다!"

그때나 그 이전이나 흑인들은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정해져 있었다. 순박하고 충직한 엉클 톰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착한 흑인으로 살든가 불평분자로, 평화를 위협하는 검둥이로 낙인찍히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헤비급 타이틀을 25차례나 방어한 전설적인 복서 조 루이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백인들의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 상대방을 KO시키고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고 백인 여성들과의 기념 사진조차 사양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 입대를 선언하는 등 '엉클 톰'으로서의 책무를 다했지만 그러나 은퇴 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도박장에서 도어맨 노릇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캐시어스 클레이는 달랐다.

프로로 전향한 캐시어스 클레이는 승승장구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거머쥔다. 거의 모든 헤비급의 강자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고 헤비급 챔피언 소니 리스튼마저 알리의 주먹에 나가 떨어진다. 챔피언이 될 때까지도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쓰던 알리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갖는다. 클레이(-Clay, 진흙)이라는 노예 냄새 풀풀 나는 성을 그는 아낌없이 벗어 던졌다. 그러나 대통령이 성서에 손 얹고 대통령 선서를 하는 나라에서 이슬람교 개종이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도전자는 끝까지 자신은 "캐시어스 클레이"와 시합하는 것이라고 우겼는데 경기에서 알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음과 동시에 "내 이름이 뭐라고? 이 바보야?" 소리를 수백 번 들어야 했다.

절정의 세계 챔피언 알리에게 닥친 결정적인 시련은 월남전이었다. 알리는 일찌감치 현역 입영 대상자였다. 앞서 언급했듯 조 루이스도 현역에 입대하여 '착한 검둥이'로서의 위상을 선보였던 바, 당연히 알리에게도 그러한 자세가 요구되었다.

1967년 4월 28일 소환장을 받은 알리가 휴스턴의 신병 집결지에 나타났다. 이들은 신체검사를 마친 뒤 루이지애나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 그 자리에 모여든 신병들은 모두 26명. 군 장교는 무하마드 알리 대신 캐시어스 클레이를 불렀다. 클레이 아니 알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이름이 호명되고 징집을 거부할 시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발해졌으나 무하마드 알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징집 거부의 사유를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이슬람교 성직자로서 미 육군 입대를 거부한다."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와의 인터뷰에서 징집 거부의 이유를 보다 소상하게 털어놓은 바 있었다.

"국내에서 흑인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로 하여금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나. 만약 내가 군대에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천200만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당장 내 스스로 입대할 것이다." 그리고 알리는 계속 '떠벌였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1967년 4월 28일, 떠벌이 알리는 행동하는 알리로 우뚝 섰다.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알리에게는 징역 5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됐고, WBA는 득달같이 알리의 타이틀을 회수했다. 여권까지 압수해 버려 원정 경기도 할 수 없었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은 일종의 미국에 대한 배신이라면서 알리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전 헤비급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 "이건 아니다. 알리는 옳은 일을 하고 너무 큰 댓가를 치르고 있다."고 분노할 정도였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부와 명성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알리는 의연했다. 당국이 형식적으로 군복을 입고 입대한 것으로 하고 복싱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알 리가 벌같이 쏜 한 마디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나는 백인들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검둥이가 되겠다. 백인 마음대로는 안되는 한 검둥이가!"

알리는 그 이후 그에게 들이닥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감수했고, 끝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 링에 복귀하여 다시금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복서로서 그가 이룬 성과도 위대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온갖 탄압과 저주와 욕설을 무릅쓰고 세상의 불의와 맞섰고 차별에 저항했으며 백인들의 위선에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위대해졌다.

은퇴 후에 전쟁 중단과 세계 평화를 호소하면서 무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2천만 끼가 넘는 식사를 제공했던 무하마드 알리. 4월 28일은 그가 챔피언에 올랐던 날들보다 훨씬 위대한 날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애틀란타 올림픽 남자농구 미국과 유고의 하프타임 때 IOC 위원장은 무하마드 알리를 '모시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중심도시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장이었던 애틀란타의 농구장을 꽉 채운 관중들은 감동적인 환호로 알리를 맞았고 IOC는 알리가 던져버린 금메달을 다시 수여했다....... 1992년 황영조에게 금메달을 건네받는 순간의 손기정만큼이나 스포츠가 빚은 최대의 감동이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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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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