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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에 이어 진은숙을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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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을 떠난다. 사전조율 없이 이메일로 사임을 통보해왔으며 서울시의회의 압박이 원인이라는 게 음악계의 중론이다. 한데 갈등을 빚었다고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어이없는 구석이 여럿 있다. 예술계의 실제 내막을 모르는 자들이 소위 '완장질'을 했다고 의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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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스 노바를 위한 변명

서울시의회는 현대음악 전문 프로그램인 '아르스 노바'의 수익성을 문제시했다. 이는 해당 콘텐츠의 속성과 의의를 무시하고 그저 숫자만 따져봤음을 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르스 노바는 돈을 벌기 위해 올리는 공연이 아니다. 한국 음악계의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로서 애초 적자를 감내하고 행하는 공연이다.

현대음악은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대중은 물론 애호가와 연주자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연히 한국에선 실연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다. 나아가 작품 발표와 학습의 장 또한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작곡가 입장에서는 작품을 발표할 무대가, 학생 입장에서는 직접 듣고 체험하며 공부할 기회가 부족한 정도를 넘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서울시향은 아르스 노바를 통해 이를 제공했다. 매년 네 차례에 걸쳐 엄선된 현대음악으로 꾸려진 양질의 공연을 시민에게 선보였다. 역량 있는 국내 작곡가에게 지속적으로 작품을 위촉해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줬고, 가능성 있는 젊은 전공자를 선발해 상임작곡가 진은숙이 직접 지도했다. 난해한 곡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단원들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건 당장의 수익이 아니라 미래의 저변 확대를 위한 장기 투자로 봐야 한다. 우리 음악계가 치르는 일종의 수업료로도 볼 수 있다. 한데 어찌 이를 두고 관객이 적다며 비판한단 말인가? 이런 사업에는 숫자로 계상되지 않는 가치가 있기에 이면의 맥락까지 살펴보고 판단하는 게 온당하다. 서울시향은 애초 적자를 감내하고 투자했다. 다른 단체는 시도조차 못한다. 그나마 서울시향이니까 가능했다.

올해 서울시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정기공연 프로그램의 상당수에 현대음악을 한 곡씩 끼워 넣은 것이다. 은근한 도박이다. 매 공연의 난이도가 올라가기에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요구하는 바가 늘어난다. 자칫하면 관객 감소를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베를린 필을 위시한 명문 악단이 홈그라운드 정기공연의 프로그램을 꾸리는 방식이다. 클래식이 과거의 박제에 머물지 않고 오늘과 호흡하며 예술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는 점에서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 올해를 끝으로 좌절될 수도 있는 시도지만 서울시향은 도전을 택했고, 그 원동력은 엄연히 10년 넘게 이어온 아르스 노바다. 수련의 장으로 충실히 기능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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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더라도 이런 식은 곤란해

진은숙이 10년 넘게 몸담은 것 또한 비판의 대상이다. 이건 분야를 막론한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데 예술계에선 특히 더하다. 양질의 일자리가 워낙 적은 탓에 다들 공공예술단체의 감투를 나눠 쓰는 데 혈안이다. 그러다 보니 특출한 역량을 가지고 성과를 내는 사람조차 일정 기간이 지나면 '너무 오래 해먹는 거 아냐?'라는 공격에 직면한다.

효과는 '직빵'이다. 독재, 특혜, 전횡 같은 단어를 부각해 의혹을 제기하면 대체로 게임 끝이다. 유명할수록 잘 먹힌다. 그럼 언론이 자극적으로 받아쓰며 조리까지 돌려주니까. 그냥 나쁜 놈으로 낙인찍힌단 소리다. 왜곡이나 과장이었음이 훗날 밝혀져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부당한 음해를 당하고 그 단체 또한 점차 망가져가도 사람들의 관심은 떠난 지 오래다.

2년 남짓 전에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떠났다. 전 대표와 직원들 사이의 갈등에서 촉발된 한바탕 난리의 불똥이 그에게 튀더니 이내 '정명훈 VS 전 대표'의 파워게임 구도로 재편됐다. 시간이 흘러 정명훈을 향한 의혹의 상당수가 무혐의, 행정착오 등으로 결론 났다. 비판할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에 전해진 것과 실제 내막은 크게 달랐다. 그동안 알려진 내용의 상당수가 검증되지 않은 과장과 왜곡이었단 소리다. 이 난리를 겪으며 정명훈은 떠났고 서울시향의 이미지는 실추됐다.

그 결과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일까? 일단 서울시향의 티켓 판매율이 급락했다. 2014년 92%에서 2015년 84%, 2016년 72%로 하락하다 지난해엔 60%대를 기록했다. 최근 정기공연 횟수를 늘리고 같은 프로그램을 이틀간 연주한 때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정명훈의 공백이 여실히 드러나는 수치다. 따지고 보면 우스꽝스러운 아이러니다. 그를 성토하며 내보낸 이들 때문에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는데, 이제 와선 투자에 가까운 아르스 노바를 두고 수익을 못 낸다며 손가락질해대는 꼴 아닌가.

연주력 저하에 대한 우려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그동안 다져온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는 없기에 아직까지는 일정 수준의 연주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상임지휘자가 없어 체계적으로 연마할 여건이 안 되는 현황에 일부 단원의 이탈까지 나타나는 흐름이어서 우려의 목소리에는 나름 일리가 있다.

돌이켜보면 서울시향을 흔들어댄 시점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진흙탕이 조성된 건 2014년인데 하필 그때는 서울시향이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였다. 외국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매 정기공연을 유료 관객으로 가득 채웠으며, 서울시 곳곳에서 자선 공연과 교육 사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찰나에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이후 서울시향은 속절없이 흔들리며 지금에 이르렀다.

책임자를 바꾸거나 예산을 줄이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근거가 단지 '오래 했으니까', '돈이 안 되니까' 등이어서는 곤란하다. 공공예술단체를 운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필요함에도 민간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분야여서다. 세금을 들여 전문가를 고용하고, 그들이 기획한 양질의 콘텐츠를 저가 혹은 무료로 시민에게 제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애초 취지다.

그렇기에 단체의 비전과 현황, 책임자의 역량과 성과 등을 다면적으로 종합해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예술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도리어 '나눠먹기' 정서가 팽배해 있다. 예술 활동으로 먹고사는 이도, 정치판에서 돈줄을 쥔 이도 매한가지다. 이렇다 보니 오래 재임하는 건 얼마 안 되는 감투를 독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돼 그 자체로 적폐 취급이다. 눈치껏 떠나지 않으면 염치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때로는 독재자라는 비난까지 듣는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 과정에서 그간의 성과가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당장 서울시향만 해도 지난 10여 년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는가? 도리어 어떻게든 헐뜯고 흠집 내기에 혈안이다. 이런 식으로는 그동안 쌓아올린 무형의 자산을 유지할 수 없다. 공공예술단체 또한 꾸준히 성장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장기적, 안정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그 큰 줄기를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임금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명훈, 진은숙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거장으로서 공히 정상급 대우를 받는다. 개방경제에서는 그를 기준으로 하는 게 기본이므로 국내의 여느 예술가와는 임금 수준이나 편의 제공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특혜라고 비판하기보다는 '그런 비용을 지불하며 그들과 함께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 그게 우리 사회의 질적 성장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될까? 대안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장기적으로 효율적일까?' 등을 다면적으로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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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애호가에게 서울시향이 갖는 의미

서울시향은 내게 특별한 악단이다. 클래식을 오디오뿐 아니라 공연장에서도 들을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서울시향 정기공연을 처음 찾은 건 10여 년 전이다. 당시의 나는 늦깎이 대학생으로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당연히 음악회는 엄청난 사치로 여겨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고학년이 돼서야 뒤늦게 알게 됐다. 서울시향 정기공연에는 1만 원짜리 자리가 있다는 걸. 그것도 수두룩하게.

서울시향은 물가가 오른 지금도 모든 정기공연에서 최저가석을 1만 원에 제공한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예로 들면 3층 좌석의 대부분이 1만 원이다. 정원의 15% 정도 되려나? 이는 다른 국내 악단과 비교해도 파격적으로 저렴한 수준으로 그 자체가 시민에겐 복지다. 서울시향이 수익을 양보해서 주머니 빠듯한 관객의 티켓 값을 보조해주는 구도인 것이다.

음악 시장에서 서울시향의 포지션은 독특하다. 저렴한 가격으로 괜찮은 연주를 들려주는 소위 '가성비'에 극대화된 악단이다. 그래서 애호가에겐 '혜자 공연'으로 불리지만 공연 기획사에겐 애증의 존재다. 어중간한 해외 악단을 유치하면 도통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돈 내고 쟤네 보느니 그냥 싸게 서울시향 보고 말지'라는 게 애호가의 솔직한 속내다. 아예 최고 수준의 명문 악단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건 티켓 가격이 너무 비싸서 걸음하기 쉽지 않다. 3층 사이드를 예로 들면 서울시향은 1만 원이고 그쪽은 7만 원 정도다. 최상석도 서울시향은 7~12만 원이고 그쪽은 30~40만 원대.

냉정하게 평가하면 서울시향의 실력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 못 미친다. 야구 투수에 비유하자면 메이저리그 팀에서 5선발로 뛰는 정도? 국내 리그를 평정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로테이션 한 자리는 따냈지만 안정적인 입지를 굳히진 못한 수준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런 투수라고 해서 찬란한 피칭을 선보이지 말란 법은 없다. 2~3선발 못지않은 경기를 치르는 날도 있고 아주 가끔은 완봉승도 거둔다.

지난해 11월을 되짚어본다. 베를린 필, 로열 콘세트르헤바우 오케스트라 등 끝판왕 악단이 집중 내한하는 시기에 서울시향 정기공연이 딱 잡혀 있었다. 1~2일의 시차를 두고 연주하는 통에 애호가 사이에선 '죽음의 조'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의표를 찌르는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멘델스존 교향곡 3번은 오래도록 응원해온 나를 뿌듯하게 만드는 호연이었다.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요약하면 서울시향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의 정기공연을 저렴한 가격에 많이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 각종 자선 공연과 교육 사업도 왕성하게 행한다. '그들만의 리그', '상류층의 전유물'이라는 대중의 편견과 달리 서울시향의 문턱은 매우 낮다. 어쩌면 그 편견이야말로 서울시향의 가장 큰 적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의 입방아 이면에는 그런 정서가 깔려 있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울시향은 참 억울하다. 클래식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시민에게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 게 지금까지 그들이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지휘자, 작곡가 등이 바뀌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저분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동안 다져온 자산을 유지하고 향후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는커녕 어떻게든 흠집을 내기 위해 공로를 무시하고 위업을 폄훼하기 일쑤다. 예술계의 속성과 내막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잠시 완장을 찼다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걸 자기의 성과인양 포장하는 촌극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HIFI STYLE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