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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서글픈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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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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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단 샤우뷔네 베를린이 5월 26~28일 사흘간 서울에서 연극 <민중의 적>을 상연했다. 헨리크 입센의 1882년 원작을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새롭게 꾸려낸 작품이다. <민중의 적>은 도시의 젖줄인 온천이 사실은 오염된 병균의 산실임을 폭로하려는 주인공을 권력과 언론이 무참하게 짓밟고 대중 또한 은연중에 그에 동조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집단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폭력에 침묵하는 다수를 강력히 비판하며 "이런 사회라면 그냥 망해도 싸다!"고 절규한다. 침묵하는 다수가 바로 민중의 적이라고 말한 셈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통렬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통렬함은 신랄한 돌직구 메시지 때문이고, 서글픔은 현실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는 예술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런 작품을 보며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지만 사실 그때뿐이다. 각자의 밥그릇을 걸고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소속 집단에 순응하며 침묵한다.

그런 모습은 최근 출간된 <1995년 서울, 삼풍>에도 담겨 있다. 삼풍백화점 참사 관련자들의 증언을 수집한 기록물인 이 책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가득하다. 먼저 희생자 친구의 진술을 보자. 건물이 붕괴되기 직전의 통화에서 삼풍백화점 직원이었던 희생자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윗사람들이 굉장히 급박하고 왠지 모르게 긴장된 모습으로 빠져나간다."며 불안을 호소하자 친구는 "너도 매장 두고 퇴근하는 건 어때?"라고 답했다. 그러자 희생자는 "저 물건들 비싸잖아.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내 책임이 될 텐데."라고 말했고 친구는 그에 공감하며 통화를 맺었다. 오래잖아 건물은 무너졌고 친구는 퇴근을 종용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슬픔과 분노를 함께 자아내는 내용이다. 백화점 임원진이 사고의 징후를 미리 인지하고도 안이하게 대처한 정황이 널리 알려졌으니 공분하는 건 당연지사다. 한데 그들을 두고 당시 직원이었던 생존자 한 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무너져 내린 쪽 반대편에 임원진들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분들이 죽지 않은 건 순전히 운이죠. 그 사람들이 일부러 대피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제가 들어도 조금 무리인 거 같아요."

아마도 인터뷰이는 임원들 또한 따지고 보면 결국 직장인이라는 점에 주목한 듯하다. (2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우리나라 조직 문화에서 '위험하니 영업 중단하고 제대로 보수합시다!'라고 직장인이 강력히 주장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주가 아닌 이상 임원이라도 마찬가지다. 별이라고 불리는 임원도 이럴진대 일반 직원은 오죽할까.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입을 닫는 게 최선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최근 갓 석사 과정에 진입한 대학원생 세 명이 지도교수가 시키는 대로 시험을 조작하다가 20여억 원을 배상하게 된 사건이 있다. 잘못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국 대학원의 실정을 감안할 때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지도교수에게 찍히면 아웃이고, 그렇게 아웃되면 다른 길을 모색하기가 벅찬 한국의 풍토에서 그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게 정녕 가능했을까? 어쩌면 침묵은 그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난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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