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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인사동, 유리창 옛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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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를 국빈방문하는 대통령의 일거일동에는 양국 현안에 대한 속뜻이 은연중 들어 있다. 1984년 개혁개방을 추구하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찾아간 곳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한 대영도서관의 책상이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실무는 협상 테이블에서 안보와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핵심 과제는 사드 문제로 금이 간 양국의 친선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두 나라의 긴밀했던 역사적 유대를, 연설을 통해 그리고 몸소 현장을 찾아가며 강조하였다.

지난 15일 문 대통령은 베이징대 연설에서 '삼국지연의'의 관우는 충의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의 동묘를 비롯해 여러 지방에 관제묘가 설치되어 있고, 완도군에서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는 2014년 시진핑 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서울대 강연에서 진린 제독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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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문 대통령은 무(武)만이 아니라 문(文)에서 더욱 우호적인 친선교류가 있었음을 말하면서 한 예로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담헌 홍대용이 엄성, 반정균 등 중국 학자들과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천애지기'는 아득히 떨어져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각별한 친구라는 뜻으로 이는 중국 학자 엄성이 홍대용에게 보낸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 대통령은 이 '천애지기'의 현장인 베이징(북경)의 유리창(琉璃廠) 거리도 방문하였다. 천안문 광장 남서쪽에 위치한 유리창은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곳으로 고서적, 골동품, 서화작품, 문방사우 상가들이 모여 있는 문화예술의 거리다. '유리창'이란 지명은 13세기 원나라 때 유리기와를 굽던 황실 가마를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17세기 청나라 때로 들어오면 가마는 폐쇄되고 그 대신 서점가가 형성되었다. 유리창 서점가는 18세기 후반 '사고전서' 편찬 작업이 장기간 진행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양의 고서들이 몰려들면서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홍대용이 북경, 당시의 연경에 간 것은 바로 그 시절인 1765년, 나이 35세 때였다.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가는 숙부인 홍억의 자제군관 자격이었다. 자제군관은 사신의 아들, 동생, 조카 중에서 한 사람에게 수행원으로 가서 견문을 넓힐 기회를 준 제도다. 그래서 자제군관은 자유로이 학자와 예술가를 만나 교류할 수 있었다. 북학파의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도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홍대용은 지동설을 믿을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연경에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갈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홍대용은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마테오리치가 세운 천주교회당을 방문하여 독일인 신부를 만나 서양 천문과 달력 만드는 법에 관해 물음을 구했다. 그리고 교회당에서 파이프오르간을 보고는 그 구조를 자세히 물어 파악한 다음, 자신이 한번 연주해보겠다고 풍류 한 곡조를 비슷하게 연주하고 나서 서양 신부에게 "이것이 조선의 음악이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왕성한 지식욕과 호기심을 갖고 있던 홍대용은 연경에서 운명적으로 엄성이라는 중국 학자와 만나게 되었다. 홍대용과 함께 갔던 이기성이라는 무관이 안경을 사러 유리창의 한 만물상을 찾아갔는데 마침 멋쟁이 차림의 두 신사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데 모두 좋은 안경을 끼고 있어서 불쑥 "저는 지금 안경을 사려고 하는데 시중엔 진품이 없으니 원컨대 귀하가 끼고 있는 안경을 살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사는 자초지종을 묻더니 "그렇다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주었다.

이기성은 엉겁결에 안경을 받아들고 사례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한사코 뿌리치고 주소를 묻자 "우리는 절강성 항주에서 온 과거 응시생으로 성 남쪽 아무 여관에 기거하고 있소"라고 했다. 이들이 바로 엄성과 반정균이었다. 반정균은 훗날 큰 학자가 되어 규장각 사검서의 시집인 <사가시집>의 서문을 쓴 분이다.

이기성은 숙소로 돌아와 홍대용에게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처리하도록 한번 만나줄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이틀 뒤 홍대용은 엄성과 반정균을 찾아갔다. 이것이 천애지기의 시작이었다. 엄성은 홍대용과 동갑으로 35세였고 반정균은 25세였다. 이들은 나이와 국적을 잊고 시와 학문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2월 한달 동안 일곱번이나 만났고 만나지 못한 날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홍대용은 그때의 만남을 "한두번 만나자 곧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동생 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한달 뒤 홍대용은 귀국하였고, 엄성은 홍대용이 "군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감추는 것은 때에 따른다"고 한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고향을 향해 남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갑자기 학질에 걸려 앓아누웠다. 병석에서 엄성은 홍대용에게 받은 글을 가슴에 얹고 그리워하다가 선물로 받은 조선 먹의 향기를 맡으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형인 엄과는 동생의 이런 임종 장면을 자세히 적어 수천리 떨어진 연경의 반정균을 경유하여 또 수천리 떨어진 서울의 홍대용에게 보냈다. 뜻밖의 비보를 접한 홍대용은 놀라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을 하고는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의 글을 써서 엄성의 영혼을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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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은 이 애사를 중국 친구에게 부탁하여 8000리 밖에 있는 엄성의 유족에게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이 편지가 도착한 날이 엄성의 대상 날이었다. 형 엄과는 강남의 학자들 앞에서 홍대용의 애사를 낭독하니 이를 듣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다투어 홍대용과 엄성의 교우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이 사실은 점점 중국에 퍼져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었고 우리 사신들이 연경에 가면 중국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하며 옷소매를 적셨다고 한다.

고국에 돌아온 홍대용은 연경에서의 일을 쓴 '연행록'과 엄성·반정균 등과 필담한 것을 모은 '회우록'(會友錄)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신진 학자들에게 대단한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박제가는 "밥 먹던 숟가락질을 잊기도 했고, 먹던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흥미로웠다고 했다. 이덕무는 이 <회우록>을 읽고서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라는 글을 지었다.

홍대용의 연행 이후 13년이 지난 1778년엔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갔고, 2년 뒤인 1780년엔 연암 박지원이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10년 뒤 박제가는 유득공과 함께 다시 연경에 갔고, 박제가의 제3차 연행은 1801년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추사 김정희가 연경에 간 것은 1809년이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 북학파의 연행 일지다.

우리 학자들이 연경에 오면 으레 유리창에 와서 책을 구하고 학예인을 만났다. 각 서점의 서가에는 선반에 책 내용을 표시한 꼭지가 달린 표갑이 수만권씩 있었다고 한다. 우리 학자들이 자주 간 단골 서점은 서문 가까이 있던 '오류서점'으로 서점 주인 도정상은 조선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중 문화교류에 끼친 그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날 유리창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1672년에 문을 연 이래 300년 넘게 이어져오는 문방사우 상점인 영보재(榮寶齋)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어 문 대통령 내외분은 여기에 들러 작품을 구경하고 차를 마시며 한-중 문화교류사의 '천애지기'를 환기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