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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농담에 대한 해설 | 최영미 시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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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역 8번 출구 앞에는 음료와 신문, 과자와 담배를 파는 길거리 매점이 있다. 여느 버스정류장에서 볼 수 있는 매점과 다르지 않다. 다만, 토요일 정오 즈음부터 오후 6시 사이에 이 매점 앞에는 맛집에서나 볼 수 있는 줄이 길게 늘어선다. 로또 때문이다.

아니 글쎄, 이곳에서 판매한 로또 중에 2등만 무려 27번 나왔고 1등은 6번이나 나왔단다. 이 거짓말 같은 우연의 중첩 때문에 사람들은 로또 판매 마감 전에 이곳에서 로또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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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잠실역 8번 출구 앞 매점.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로또를 사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늘어뜨린다. ⓒ 최황

'로또 1등이 되면...'이라는 'if 절'(가정법) 뒤의 욕망을 품고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이들을 보자. 800만 분의 1이라는 당첨 확률, 이 묵묵부답일 확률에 '혹시'를 달고 저 대열에 합류한 이들이 풍기는 열망의 발산이, 그러니까 확률적으로 헛된 희망의 발산이 얼마나 농담에 가까운가?

'로또 1등이 되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에 무엇을 이어 붙이든, 저 매점 앞에 줄선 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농담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 농담을 보게 된다면, 피식 웃고 말면 될 뿐이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 8시 40분이 되면 아주 큰 확률로 별 실망도 없이 구겨질 영수증을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그 매점 바로 밑, 지하 1층엔 교보문고 잠실점이 있다. 그곳에서는 단돈 8000원에 시집을 한 권 구입할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짓이겨 언어로 반죽해낸 시들을 엮은 작은 책을 살 수 있는 돈이 고작 8000원이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신의 삶을 녹인 글을 쓰고 파는 한 시인이 괴상한 논란에 휘말렸다. 최영미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평생 홍보를 해줄 테니 호텔 방을 1년만 빌려달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졸지에 '갑질 시인'이 돼버렸다.

필자의 눈에는 로또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이들의 행위와 최영미 시인의 페이스북 글이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둘 다 농담에 가깝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아무리 진심에 진심을 다해 호텔 방을 열망했을지라도 시인의 글은 결국 농담의 범주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피식 웃고 말면 될 뿐인 글이란 말이다. 이쯤에서 잠시 시인이 돼보자.

시인은 곧 주거지를 옮겨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푸념하듯 늘어놓다가 언젠가 자주 이용했던 호텔 1층의 레스토랑이 떠오른다. 그러다 묘안 하나가 머릿속에 착륙한다. 즐거운 상상이 이어진다. 만약 그들이 받아들인다면,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보고 싶다. 그렇게 '호텔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준다면, 평생 홍보대사가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낸다.

여기까지가 'if 절' 뒤의 욕망을 품고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긴 행위의 전부다. 로또를 사려고 줄을 선 이들과 다른 것은 '호텔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이라는 지점뿐이다. 그것도 공짜로 방을 쓰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호텔 방 1년과 자신에게 남은 평생의 시간을 맞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뭐, 시인에게 호텔을 작업실이나 서재처럼 이용하는 것이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직접 도로시 파커를 언급한 것도 그렇거니와 애거서 크리스티도 말년에 호텔에서 죽지 않았나. 한 예술가가 치열한 삶을 정리하는 공간이든 긁어모은 영감을 도열시키는 공간이든 어떤 공간에 대한 낭만 섞인 욕망을 품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어떤 제안을 했다며 농담조로 밝힌 것을 두고 벌어지는 일들의 우스꽝스러움을 보라.

그게 뭐라고 [단독]씩이나 박아 넣고 기사를 쓰는 〈중앙일보〉 기자부터, 을도 병도 정도 존재하지 않는 일에 갑질을 했다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경유해 '시인 나부랭이가 그 호텔을 홍보한다고 무슨 도움이나 될 줄 아느냐' 힐난하는 이들에 이르는 촌극.

심지어 어떤 이는 '그런 방에서 시 쓴다고 잘 써질 것 같으냐'는 시시한 비아냥을 일삼으며 '좋아요'를 한껏 받아내고 있었다. 결국에 농담일 수밖에 없는 일을 두고 죽으라며 날카롭게 벼려 투창하는 이들을 보며, 소름이 돋아나는 팔꿈치 위를 연신 쓰다듬었다.

이런 제 모습들이 농담 같은 줄은 모르고 시인의 농담 하나를 제대로 읽지 못해 화가 잔뜩 나서는 입에 걸레를 물고 침을 튄다. 그렇게 일주일을 살다가 고해소 앞에 늘어서듯 또 번호 여섯 개를 골라 마음속에 꼭 쥐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로또라는 농담을 할 사람들이 말이다. 농담 같은 시계(視界)다.

그래서 가봤다, 아만티호텔... 글 참 잘 써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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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이 평생 홍보를 해주겠다며 1년만 방을 빌려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한 마포구 소재의 아만티 호텔. 월요일 저녁, 호텔 레스토랑에는 필자뿐이었다.ⓒ 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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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최영미 시인 덕에 한껏 유명세를 올린 아만티호텔. ⓒ 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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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일부러 시인이 언급한 호텔의 1층 레스토랑에서 이 글을 썼다. 왜 이런 곳을 열망하는지 알 것 같았다. ⓒ 최황

필자는 최영미 시인이 언급한 아만티호텔의 1층 레스토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솔직히 너무 비싸면 어떡하나 긴장하며 메뉴판을 살폈는데... 아메리카노 한 잔에 4500원이다.

호텔 커피를 마시며 호텔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니 왠지 글이 술술 잘 써지는 것 같다. 필자는 이번 일로 아만티호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는데, 이렇게 아만티호텔을 알게된 이들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한 시인 덕에 제대로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필자도 제안 하나 한다. 아만티호텔은 최영미 시인에게 2박 3일 숙박권이라도 증정하라고. 물론, 농담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