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현산 Headshot

더디고 더딘 광복

게시됨: 업데이트됨:
1
뉴스1
인쇄

나는 1945년에 태어났기에 해방둥이라는 말을 늘 유심하게 들으면서 커왔으며, 그 말이 내 동갑들에게 해방의 축복을 두 배로 늘리는 것 같아 자랑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제는 해방이 70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고 내 동갑들의 나이도 70이 넘었으니 그 말로 지시해야 할 대상 자체가 사실상 없어졌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광복된 조국과 생년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해야 할 조국의 정신적 운명이 자신들의 생물학적 운명과 무슨 평행관계라도 이루는 것처럼 착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인데 '해방 조국'이 어느 시절까지는 우리 세대와 함께 철이 들어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컸다.

다섯 살에 한국동란을 맞고 그 전쟁이 끝나면서 곧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방둥이들은 학교에서 글을 배웠지만 노래도 배웠다. 교과서에 나온 노래가 아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노래 가운데는 〈조선의 노래〉가 있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가사가 이렇게 시작한다.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도 부른 노래라서 아마도 그 가사가 온전히 기억에 남아 있을 터이다.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반구는 조국의 지세와 그 크기를 말하고, 뒤의 반구는 그 아름다움과 유구한 삶의 역사적 전통에 관해 말한다. 새로 독립한 나라가 그 국민들에게 강조해야 할 모든 것이 거기 다 들어 있다. 독립을 맞아 새로 문을 연 학교가 이런 노래를 가르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학교에서 배운 노래로 내용이 비슷하지만 더 강력한 느낌을 주었던 노래는 가사 중간에 "단군성조 세워주신 신성한 나라 뭉치자 민족의 혼 바치자 충성"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지만 그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영광의 피를 받은 한 뿌리 민족"이라는 말도 그 가사의 일부였던 것 같다. 해방과 함께 조국이 둘로 갈라지고 갈라진 두 조국이 서로 맞붙어 전쟁까지 치렀으니 나라와 학교가 이런 노래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런 애국가요보다 더 많이 마음을 움직인 노래를 학교 밖에서 배웠다. 이 노래도 제목은 잊었고 가사만 기억난다. "아버지 학교에 보내주세요. 저기 가는 저 학생 바라보세요. 검정치마 흰저고리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이 나는 부러워." 해방이 되고 나서는 곧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으니, 이 노래는 식민지 시대부터 불려왔을 것이 틀림없다. 해방 후에도 의무교육은 명색일 뿐이어서 학교에 일정한 운영비를 지불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월사금이라 하는 적지 않은 수업료를 매달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고 한다. 가난한 부모가 그 돈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어린이의 불행은 글을 깨칠 수 없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정치마 흰저고리와 가방이라고 하는 유니폼은 학생이 될 수 있었던 아이들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내고 그 신분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문화를 암시한다. 한 사회에서 선별된 사람들이 누리는 문화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억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 억압을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체험했다.

해방과 전란 이후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누구나 학교에 갈 수 있고 또 가야 했다. 당시 농민이 전체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나라의 어린 학생들이 우선 알게 된 것은 학교 건물이 자신들의 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그 안에서의 생활방식이 집에서의 생활방식과 다르고 양쪽에서 쓰는 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명백한 문화 충격을 느꼈지만 그것은 저마다 감추어야 할 충격이었기에 입을 열어 그것을 말하는 학생은 없었다. 어쩌면 이 충격은 학교교육이라고 하는 거대하고 움직일 수 없는 제도의 무게 때문에 느끼기도 전부터 내면화되어 있어서 학생들은 충격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크게 보면 근대화의 이념과 민주주의의 이념이 우리 몸속으로 함께 들어온 것도 이 충격의 자리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먼저 근대를 만난 도시가 농촌을 식민지화하는 추세도 이 내면화된 충격을 통로로 삼았다. 그리고 이 통로에는 "아버지 학교에 보내주세요"라는 노래가 복잡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 이 충격을 일종의 세례로 여기는 어떤 의식이 그 노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생들에게 그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도 애국과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사일구는 또한 못다 이룬 해방과 광복의 연장이고 또 하나의 단계이기도 했다. 이 혁명은 역사의 곡절 속에서 상실했던 기회를 되찾아, 제 뜻으로 설계하고 제 손으로 이행해야 할 나라다운 나라의 건설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해방과 민주의 의식이 사람들의 몸을 관통했고 이 충격은 감춰야 할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 뜨겁고 거센 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길고 긴 군사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재자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것을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지만, 따지고 보면 그 혼란은 인간 심성의 복잡함이자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복잡함이며, 거기에 토대를 둔 온갖 사회적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노래에서건 영화에서건 시에서건 모든 종류의 새로운 발상법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해방에 대한 숨은 갈망이 더없이 깊어졌을 때 박정희는 죽었다. 깊은 갈망은 또다시 드러난 갈망이 되었다. 날마다 새로운 시와 노래가 만들어졌고 전대미문의 지적 열기가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다. 신군부가 견디지 못한 것도 그것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내세운 바로는 그렇다. 나라는 또다시 사슬에 묶였다. 광주가 피를 흘렸고 긴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싸움 끝에 1998년에는 마침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고, 그 기운을 타고 2002년 월드컵 행사 때는 온 나라 사람들이 "아 대한민국"을 그지없이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었다. 조국 광복이 그렇게 고개 하나를 더 넘었다. 우리의 앞길에는 팔일오 해방과 더불어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 여유를 타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열정과 그 해방 다음에 늘 찾아오는 억압이라고 해야 하나. 사회는 분열되고 성장하던 민주의식은 억압을 당했으며, 어렵게 닦아놓은 통일의 길은 끊어졌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정의도 안전도 확보해주지 못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는 삼백 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배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았지만 나라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다. 내 주변에는 그 추운 겨울에 열아홉 번 스무 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다. 나라 아닌 나라에서 신생독립국을 세우는 심정이었을 터이다.

박근혜의 탄핵이 결정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운동권 전체가 반세기의 노력으로도 깨뜨리지 못한 박정희 신화를 그 딸이 삽시간에 깨뜨렸다." 물론 항간의 우스개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진실도 담겨 있다. 이제는 어떤 역풍도 역사의 아름다운 조류 위에서는 순풍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그 우스개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한 번 광복의 고개에 올라설 수 있었다. 광복은 이렇게 더디고 더디지만 그 최초의 정신이 우리를 내내 지켜주기도 했다. 나는 그 정신이 "아버지 학교에 보내주세요"라는 노래와 여전히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