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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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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Shutterstock / Manczu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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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권력을 사유화하려던 몇 사람의 농간으로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작성되고, 창작 활동의 터전과 목표가 심하게 왜곡된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동안 문화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최순실의 국정농간 사태가 세상에 폭로된 것과 거의 동시에 문화계의 여기저기에서는 성희롱 추문이 터져 나왔다. 안과 밖은 늘 함께 썩기 마련이라고 말하면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겠지만, 내가 평생을 몸담아온 문단에서 이 추문이 시작되었고, 그 당사자들 가운데는 내가 기대를 걸고 신뢰했던 시인들도 끼어 있으니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의 이런저런 게시문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몇몇 가해자들이 그 추행을 자행하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내비친 행태는 비열하고 악랄하다. 더구나 문학에 뜻을 둔 '습작생들'을 대상으로 이 부끄러운 일이 저질러졌으니 그 실상이 더욱 참담하다. 미성년자이기도 할 습작생과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기성 시인의 관계에 평등한 합의를 바랄 수는 없다. 어떤 시인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내세워 협박의 무기로 사용하거나 상대방의 동정심을 유발하였다고도 한다. 사실이라면 인간의 선의를 배반한 죄가 크다. 자신의 나쁜 목적을 위해 문학 그 자체를 모독한 경우도 있다. 한 시인은 고등학생인 습작생들에게 성적인 탈선이 문학적 감수성을 기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며 그 일탈과 그로 인한 피해 전체를 '미학적 실천의 일환'으로 여기게 하였다니, 그 글쓰기 교육의 내용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자격과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문학교육이건 다른 교육이건 교육만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다. 미숙한 선생은 그 영향력의 깊이로 자신의 교육자적 자질과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학생의 정신과 육체를 식민화하려 한다. 글쓰기 교실의 수업처럼 제도의 뒷배가 없는 교육일수록 그 식민화의 욕구가 더 커질 수 있고, 그 지배 방식이 폭력적일수록 학생에게 미치는 선생의 영향력이 깊어진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학생을 식민화하려는 시도는 선생이 스스로 품고 있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과 연결될 때가 많다. 지배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

문학과 예술을 직업으로 삼고 그 기예를 익힌다는 것은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아들이 되는 일이 아니며, 윤리적인 인간이나 좋은 시민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토마스 만이 그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발설했던 말이다. 문학과 예술이 한 시대의 윤리에 지배되는 것도 아니고, 그 윤리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빈말도 헛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과 예술이 비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며, 윤리적 탈선을 진보적 윤리관으로 포장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거나 봉사하지 않기에, 그 윤리의 뿌리와 현재적 의의를 성찰하는 여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며 생생하게 윤리적이다. 윤리적 탈선이 권력의 위계에 이른다면 거기에서는 윤리의 뿌리도 그 생생함도 찾을 수 없다.

성희롱 추문이 터져 나올 무렵, 한 시 잡지의 신인상 심사가 부정청탁의 의혹을 사게 되어, 그 의혹이 문단의 등단제도 전반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등단'은 '데뷔'라는 서양말의 번역어다. 신인작가는 글 쓰는 사람들의 사회를 뜻하는 문단에 어떤 방식으로건 첫발을 내딛게 마련이며 그것이 곧 등단이다. 문제는 그 첫걸음이 일정한 제도적 절차를 밟아서만 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등단·비등단을 갈라 엄격한 선을 긋게 하고, 문학지망자들과 기성 문인들 사이에 불필요한 위계를 만들어 문단 권력의 한 축을 쌓아 올린다. 권력은 늘 부당한 압력을 부를 수 있다.

문인으로 등단하는 몇 가지 길이 있으며, 가장 유명한 길이 신춘문예다. 서울과 지방의 거의 모든 일간신문들은 해마다 한 번씩 각 장르별로 신인을 한 사람씩 뽑아 문단과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몇몇 신문사나 잡지사의 장편소설 모집과 함께 가장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할 수 있는 길이다. 그다음으로는 문학잡지의 신인상이 있다. 문학잡지들은 주로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년 한 차례 이상 신인을 뽑는다. 신춘문예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등단 잡지라고 하는 발표 지면이 있어서 신춘문예보다 훨씬 더 실속이 있는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추천이다. 옛날 문학잡지들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기성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신인의 작품을 게재했으며, 정해진 횟수를 채우면 기성 문인으로 대우했다. 잡지들은 오랫동안 이 추천 제도를 선호했지만, 잡지의 운영상 이유로, 또는 그 잡지와 연결되어 있는 문학단체의 내부 사정으로 수십명의 신인을 한꺼번에 추천하는 폐단이 나타난 이후 대부분 신인상 제도를 선택했다. 한 가지 길이 더 있다. 시집이건 소설이건 자비로 단행본을 출판하는 길이다. 좋은 길이지만 지극히 비범하거나 운 좋은 작품이 아니라면 언급해주는 매체가 없어 현재로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길이다. 등단제도는 신인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독자의 관심을 모아주는 제도이지만 한편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재능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 능력의 발휘를 막아버리는 제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늘 공평한 것도 아니다. 어느 길에서건 등단 심사 후 공정성에 대한 의혹이 없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선정된 작품의 질을 내세워 그 의혹을 덮어왔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는 어떤 길을 밟았건 수많은 '등단 문인들'이 있다. 시인만 해도 5만명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발간되는 크고 작은 잡지들이 모두 신인을 배출하고, 여러 문화제의 백일장으로 등단한 문인들도 있으니 그 수를 모두 헤아리기 어렵고 정확한 통계도 없다. 그러나 현재 시집을 시리즈로 발간하는 네다섯 정도의 메이저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가면 하나 이상의 출판사에서 군말 없이 시집을 내줄 수 있는 시인은 300명 안팎이다. 등단 이후의 활동으로 편집자들과 독자들의 시선을 자주 끌었던 시인들이다. 두 번째 등단을 거쳤다고 말해야 한다. 문학과 관련된 자리에서 시인으로 떳떳하게 대접받는 것도 그 사람들이다. 이 점은 등단의 문턱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등단 비리가 있었다면, 이 비리는 어쩌면 그 문턱이 낮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크게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도 가장 공정한 등단은 등단제도가 없는 등단일 것이다. 야심 있는 신인들이 출판사에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보내고, 출판사가 마음에 드는 원고를 골라 책을 출판하는 방식은 특별히 공정함을 요구하지 않아도 공정하기 마련이다. 출판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출판사는 상업적 전망이 있거나 출판사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훌륭한 원고가 아니라면 출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한 출판사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받아 편집위원들의 검토를 거친 후 출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인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신인이 제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길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식민화 시도도, 등단·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등단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