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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화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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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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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 있는 한 대학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교수들이 교수 휴게실에 모여 춘천과 서울을 잇는 자동차 도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춘천 출신이기도 한 나이 든 교수가 말했다. "옛날에는 산길로 덕두원 고개를 넘어갔는데." 그는 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하인에게 말고삐 잡히고 한가롭게 이동하던 그때가 더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 잔등에 탄 사람이면 좋았겠지만, 말고삐 끄는 사람이었으면 어떡하게요." 분위기가 조금 싸늘해졌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건 허구의 서사에서건 사람들은 주인공의(대개는 양반 계급의 선비나 무인이다)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대입시킨다. 그렇게 해서 한순간 마음의 호사를 누린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 칼을 맞아 죽게 된 양반 주인공 대신 하인이 몸을 던져 생명을 바치는 장면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자신의 심사가 얄궂다고 느낄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하인의 죽음은 곧 잊힌다. 저 '스펙터클한 대 로망'에서 하인의 죽음 따위는 사건조차도 아닌 것이다.

최근에 제6시즌의 방영을 끝낸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발라 모르굴리스)는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주인공이라고 여겼던 인물들의 목이 무참하게 잘려나가니 시청자들은 자기투사를 할 짬이 없다. 낭만적 자기투사를 용서하지 하지 않는 그 냉정함에서 이 드라마의 인기가 비롯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여전히 서사에 막중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안타까움도 통쾌함도 그만큼 큰 귀족들의 죽음이다. 죽음에서까지도 천민들은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없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에 가끔 등장하는 신원미상의 젊은 기사만큼 독자들의 자기 동일시에 알맞은 주인공도 드물 것이다. 물론 이야기의 진전과 함께 그는 귀족의 후예인 것으로 밝혀지지만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무리 없이 정서적 계급 상승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주인공은 거리의 부랑아들과 친교를 맺고, 산속의 의적단과 협력하고, 사회적 타자들의 후원을 얻어낸다. 그것은 그의 스산했던 성장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이력 자체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감정교육의 한 과정일 수도 있다.

재미교포 한 사람이 십수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그 소감을 적어 온라인에 올린 글이 있다. 그는 먼저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말한다.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전자화·자동화되어 있다. 대중교통도 집의 출입도 카드 하나로 해결된다. 웬만한 집에는 냉장고가 두 대씩 있고, 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었고, 택시는 요금이 매우 싸고 전화 한 통에 음식이 배달된다. 버스정류장에서까지 초고속 와이파이가 잡히고, 지하철과 고속철은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다. 게다가 이 글을 토대로 그린 윤서인의 만화 <조이라이드>에서는 지하철의 스크린도어와 "언제든 열린 가게들과 대리운전 서비스"도 언급한다. 재미교포는 이 편리한 나라를 왜 사람들이 지옥으로 느끼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국이 지옥인 이유는 벌써 그의 묘사 속에, 또는 윤서인의 그림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글과 만화가 발표되고 나서 며칠 뒤에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저 유명한 '민중 개돼지론'이 등장했다. 그의 발언이야 이미 온 나라에 다 알려져 있으니 다시 들추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내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것은 '개돼지'라는 표현도 아니고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는 그의 신념조차도 아니다. 그런 주장이나 표현은 토론이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늘 토론할 수 없는 것 속에 있다. 문제의 회식 자리에서 한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획관은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가슴 아프지도 않은가.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다.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 그는 어떻게 "그게 자기 자식처럼 생각이 되나"고 되물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고 잘라 말했다.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구의역의 수리공을 진실로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닌지 자문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그 생각을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그 많은 사람들은 제 생각을 버선목처럼 까 보일 수 없다. 그 사람들과 나향욱들은 끝내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충격적이다.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

온갖 종류의 서사 앞에서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그의 하인에게 냉담한 것은 주인공이 더 높고 더 화려하고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사의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하인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다. 우리가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만 그의 하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일인칭 서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삼인칭 전지전능의 서사라고 하더라도 사건의 전개는 거의 언제나 주인공의 의식으로, 아니 최소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공은 직접 만나지만 하인은 간접적으로만 만난다.

이 간접화는 불행하게도 서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컴퓨터의 본체와 모니터 안에는 수많은 부품이 있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몇 개의 단추가 있는 본체의 외관과 모니터의 화면뿐이다. 그것을 인터페이스라고 부른다. 우리의 삶과 사회에도 이 인터페이스가 있다. 갸륵한 마음으로 조국을 예찬하는 저 재미교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갖 편의성의 이기들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인터페이스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지하철의 스크린도어(안전문)를 보지만 그 뒤에서 죽어가는 젊은 수리공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 수리공을 간접화하고, 저 값싼 택시의 운전기사를 간접화할 때, 또 한편에서는 우리가 삶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곤경이 간접화된다. 우리는 저 간접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모든 불편과 위험과 치욕을 맡기고 때로는 죽음까지도 맡긴다.

통합적 인류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유발 하라리는 노예무역과 관련하여 무관심과 탐욕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더 많이 열거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는 값싸게 설탕을 살 수 있게 된 것을 행복하게 여긴 소비자들도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