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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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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컴퓨터를 켜고, 자동조제기를 예열하고, 사무실과 각종 기계의 상태를 점검하고 청소한다. 그러나 지난 9월 그가 1년 기간의 근로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계약서에 기재된 업무 시작 시간은 10시30분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A는 출근 며칠 뒤 받은 계약서에 서명할 때 30분에 관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답변은 인수인계 과정에서 몇번 근로조건에 관한 푸념을 늘어놓던 전임자가 했다. "조금 먼저 와서 일할 준비를 하는 게 일하는 사람의 기본 아닌가요?" 교대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정해진 시간보다 무려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 먼저 나와 업무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었다.

근로계약서에 적힌 월급 110만원은 업무의 고단함에 비해, 한 아이의 가난한 엄마가 넘어야 할 세상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았다. 착오라도 있지 않은지 평일 5일 하루 6시간, 1개월 유급노동시간 157 등의 숫자들을 점검해 보았다. 월급을 유급노동시간으로 나누어 보니 시급 7000원꼴이었다. 올해 최저임금보다 높다! 하루 6시간에 빼앗긴 30분을 더해 한달 유급노동시간을 계산해 보니 170시간이다. 이제 110만원을 170시간으로 나누자 마치 마법처럼 올해 최저임금 6470원이 떨어진다. 이건 뭘까?

어쨌든 빼앗긴 30분을 돌려받고 2018년 최저임금 7530원을 적용할 경우 내년 1월부터는 월 18만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걸 계산해 냈을 때 그는 기뻤다. 18만원은 그에게 간절한 액수니까. 인사 담당자에게 내년 임금 인상 계획이 있는지를 묻는 일에도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조제 보조는 임금 인상이 없습니다." 병원의 행위는 명확한 불법이다. 그러나 수습기간이 끝나고 시정을 요구하리라는 생각은 꼬리를 무는 다른 생각 때문에 자신을 잃었다. 여기서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만약 여기서 승산이 높지 않다면 다른 곳이라고 다를까?

조제 보조는 이직이 잦다. 하지만 병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떠난 자리를 채우겠다는 지원자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잦은 이직으로 증가하는 불편과 교육 업무의 부담은 절대 병원의 몫이 아니다. 계약서에 일요일을 휴일로 명시해놓고 평일 어느 날 대신 일요일에 일해야 할 경우 휴일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병원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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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만 직장 안에 인간의 등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추석 명절 때이다. 직원들의 명절 선물은 한우갈비, 고급 세제 세트, 스팸 세트 세 종류였다. 선물 세 종류는 정확하게 급여 차이로 표현되는 병원 내의 지위에 따라 나뉘었다. 시간제 보조직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정규직이 겪는 이런 종류의 일들을 다룬 언론 기사를 읽었던 느낌이 떠올랐다. 안타까웠지만, 그것은 그것보다 더 삭막한 일들로 가득 찬 세상의 익숙한 풍경 중 하나로 스쳐갔을 뿐이다.

자신이 당사자가 된 낯선 경험은 태어나 처음 해보는 낯선 질문들로 A를 이끌었다. 의사들은 자신의 '세전' 급여의 10배 정도를 '세후' 급여로 받는다고 들었다. 이 차이는 너무하지 않은가? 인생에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벗어나려 발버둥 친 시간제 일자리, 몇년 전 반월세로 전환해야 했던 서울의 전셋값 폭등, 지금 수입으로는 버거운 교통비와 휴대폰 요금 등등, 이 모든 것들 속에 자신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던져져 있을 뿐이었다. 출퇴근 시간의 이점은 보육에 유용했지만 하루 8시간을 일해 더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유용하지는 않다. 이 직장에서는 이조차 선택할 수 없다.
교대로 주말 당직을 서고 연차가 5일밖에 안 된다는 의사들을 더 적게 일하게 하고 그들의 보수의 일부를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 일하는 자신으로 이전시킨다면 의사와 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사회 전체에도 이로울 이 간단한 방법의 행복을 무엇이 막는 것일까? 사회의 제도는 새해에 자신이 월 18만원을 더 받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면서도 어째서 자신이 막상 이 정의를 실현하려 나서는 것에는 큰 결심이 필요해야 할까?

A는 2017년 9월 어느 날 자신을 스쳐간 이런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있는 언어를 지금도 찾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한 정치경제학이 수백년도 넘게 이런 종류의 질문에 답하려 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