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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지역주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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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신랑을 평생 기다리다 앉은 채로 재가 되어 버린 한 여인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영양군 일월산에 있는 황씨부인당은 한 많은 삶을 살다간 그 여인을 기리고 있다. 첫날밤 신랑은 신방 문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보았다. 신부를 빼앗긴 연적(戀敵)이 자신을 죽이려고 들고 온 칼 그림자로 오인하고 곧장 멀리 떠나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우연히 그곳에 들렀는데 처음 모습 그대로 신부가 있었고, 안쓰러워 어깨를 어루만졌더니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내용이다.

이 슬픈 전설은 시인들의 시 소재가 되기도 했다. 서정주는 '신부'에서, 조지훈은 '석문'에서 여인의 한을 그려냈다. 지난 4·13 총선 결과를 보며 황씨부인당 전설이 떠오른 것은 오해와 외면, 기다림 그리고 형체의 소멸 등이 그간 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있던 배타적 지역주의의 약화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신랑이 오해했듯 영남과 호남에서 오랫동안 독점해오던 정당 이외의 정치세력에서는 그 지역을 실제보다 더욱 크게 오해해왔다. 그리고 외면해왔다. 도무지 꿈쩍도 않는 곳이라며 지역 탓만 하고는 찾아가보려 하지 않았다. 물론 지역주의 정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후 완화의 징후들이 드러나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긴 세월이 흘러 이번에 찾아가보니 지역주의가 재가 되어 무너지고 있었던 셈이다.

4·13 총선에서 영남과 호남의 결과는 전체 선거 결과만큼이나 놀라웠다. 뉴욕 월가의 투자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결코 통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본인의 저서에서 '블랙스완(Black Swan)'이라고 했다. 흰 백조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데 검은 백조가 발견된 충격적 상황을 일컫는다. 영호남의 이번 선거결과를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인 블랙스완으로 불러도 된다고 말할 정도다.

브랜드슬로건인 'Colorful DAEGU(다채로운 대구)'가 무색할 정도로 정치영역에선 짙은 단색이었던 대구에서 야당 간판의 당선자가 나왔다. 야당 성향의 무소속 당선자도 배출되었다. 여당 성향이긴 하지만 무소속 후보도 당선되었다. 부산과 경남에서는 야당 당선자가 9명이나 나왔다. 호남의 변화 강도는 더 거셌다. 터줏대감이었던 정당은 참패하고 신생정당이 의석을 휩쓸었다. 전남과 전북에서는 영남을 지역기반으로 해온 정당 소속의 당선자도 나왔다.

지역을 오해하고,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영남과 호남에서 주류 정당에 도전하려는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 인물들이 지레 겁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정당만 옹호하는 배타적 지역주의는 이미 형체만 남고 실제로는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지역주의를 폐기할 마음을 오래전에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요자인 유권자 탓을 했지만 정작 책임은 공급자인 정당과 정치인에게 있었다.

그간 경쟁구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권자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선택지가 여러 개 제시된 것이다. 정당 소속이든 무소속이든 기본 경쟁력을 지닌 인물이 한 지역구에 여러 명 나온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성립하니 지역의 유권자는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배타적 지역주의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공한 사례를 봤으니 도전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영호남이 어느 특정 정당의 절대적 우세지역이 아니라 상대적 우세지역 정도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비록 일월산 황씨부인당 전설은 맺힌 한이 그대로 남고 말았지만, 배타적 지역주의 전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배타적 지역주의는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라고.

* 이 글은 영남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