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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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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어떤 메모]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 탁현민·김수연·김애경·이윤철 지음, 해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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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의 해임을 원치 않는다. 그의 책을 비판하는 글을 몇 차례 썼지만, 한 번도 경질을 주장한 적은 없다. 비판이 모두 사퇴로 연결된다면 어떤 논쟁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독이 우려되어 다시 쓴다.

탁현민. 저자 이름이 글 제목이 되었다. 이제 그는 보통명사다. 처음 관련 글을 썼을 때, 지인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네 주변 진보 중에 탁보다 더한('더 저질인') 남자 많잖아! 근데 왜 그 사람만 비판해?" 나는 바로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알았어?" 여성을 상대로 한 일부 진보 남성의 경제적·감정적 착취, 성폭력, 횡령, 사기, 권력욕은 드문 일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인간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인간성이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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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사건 자체보다 해석으로 이루어진다. 진짜 문제는 탁씨의 책 내용이라기보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이다. 여론은 한국의 남성 문화보다 그의 거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뉴스는 주로 대통령의 침묵과 여야 간의 기싸움이 메우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두 가지 논쟁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사퇴 여부와 사퇴한다면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이다. 여야의 정치 공방도, 문재인 정부 지지층 내부의 입장 차이도 대부분 이 안에서 부딪치고 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의 가장 핵심인 성차별 인식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탁씨와 현 정부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론은 현실 정치, 여야 갈등만을 문제 삼고 있다.

젠더(성별 권력 관계)를 여당과 야당의 정치 공세 안에 가두는 것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전개다. 가부장제는 젠더 문제를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아니라 남성 간 정치의 부산물로 종속시켜 사소화, 개인화, 부차화하는 제도다. 여성은 시민이 아니고, 따라서 젠더 이슈는 독자적인 정치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비하도 차별도 혐오도 아니다. 정확히 말해, 멸시다.

여성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논의의 전선을 이동시키는 작업이다. 이 과정이 사회정의요, 국정과제요, 여성주의다. 기존의 논쟁 구도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탁씨의 인권 의식, 개인적 거취, 그와 문재인 정부의 관계는 완전히 별개의 사안이다. 이를 한꺼번에 해임 여부로만 환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논의 방식이 아니다. 그가 그만둔다고 해서, 탁씨를 통해 드러난 한국의 남성 문화가 변하지는 않는다. 여성들이 바라는 것은 탁씨가 그만두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 문화가 바뀌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란이 계속되면, 탁씨가 피해자라는 논리까지 등장할 판이다. 한국 남성 문화가 강간 문화임을 인정하고 개선하면 된다. 누구나 놀라는 '그런 사람이 거기까지 올라간' 구조를 바꿔야 한다. 가장 비논리적인 방어는 '젊은 날의 실수'라는 것이다. 과거가 없는 사람도 있나. 과거는 선택적인 개념이다. 어떤 사람의 과거는 사회적 매장감, 감옥행이다. 이번 사건처럼 대통령의 최측근, 유력 국회의원, 유명인사가 앞장서서 남의 과거를 해석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모두가 '탁류'(卓類)요, 탁류(濁流)다.

거듭 강조하건대, 그의 '능력'이 문재인 정부에 일조하기를 바란다. 탁씨의 책으로 충격받은 남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여성의 분노는 남성의 반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이렇게 말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은 남성의 행동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라고. 청와대는 '일개 행정관'의 문제로 고민할 시간에 여성의 삶에 대해 공부하길 바란다. 야당은 더 심각하다. 자기 당 남성부터 통제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역사가 될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젠더 문해력(文解力)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젠더 인식은 '국격'의 지표다. 이번 기회에 그의 책을 국가가 무료로 배포, 전 국민이 필독하고 타임캡슐에 넣어 보관하기를 제안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