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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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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맞아 시골에 내려갈 때면 할머니는 항상 물어보시곤 한다.
"하영이, 요즘 공부 열심히 하나?"
나는 어쭙잖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네, 그런대로요."
그러면 꼭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1등 했냐?"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긁적인다. "1등은 아니고요, 제가 하는 공부는, 그게......."
할머니는 손자의 난처한 표정을 보시고는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으신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이놈이 공부를 하긴 하는데 1등은 못하는구먼.'

그렇다. 늘 반복되는 질문이다. 친구들을 만나도 묻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묻는다. "공부는 잘해?" "몇 등이야?" "대학은 어떻게 할 거니?" "인 서울? 아니면 지방대?" 이어지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정받기도 하고 또 무시당하기도 한다. 역시 한국 사회에서 학생의 최고 미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여기서 '공부'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말이다. 아마 너무 당연해서인지도 모른다. "공부 잘해?"라는 질문에서 '공부'는 바로 '성적'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성적은 시험을 통해 얻는 것이고, 시험은 답을 맞히는 것이다. 그리고 답을 맞히려면 끊임없이 암기와 문제 풀이를 반복해야 한다. 결국 수많은 정보를 머리에 힘껏 쑤셔 넣었다가,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배설해버리는 행위를 얼마나 능숙하게 하느냐, 이것이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이다.

다시 할머니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누군가 나에게 공부를 잘하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시험을 잘 보는 편이 아니고, 성적을 받아본 경험도 거의 없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에 암기를 잘 못하고, 정해진 답을 맞히는 것엔 정말 형편없다. 그렇기에 나는 공부를 못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에 빗대어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크게 낙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있어 공부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부는 수치화할 수도, 점수를 매길 수도 없다. 내 공부법이 낫니, 네 공부법이 낫니 비교할 수도 없다. 그저 나에게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이 가야 할 길이 있을 뿐. 각자의 길을 걸으며 각자의 고민을 발견하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움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그렇기에 "공부 잘해"라는 질문은 매우 비정상적일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오로지 나만의 배움을 어떻게 추구해나갈 것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나갈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배움은 대부분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교감하거나 책을 통해 누군가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며, 비로소 머리로만 알던 지식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촛불집회이다. 그동안 민주주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처음 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온통 비민주적 의사 진행 절차와 과정뿐이었다.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날치기,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까지.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을까. 내가 배운 민주공화국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의심과 회의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려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매주 변화를 부르짖었고, 그와 동시에 사회는 실제로 바뀌어갔다. 몇 달 전이면 상상도 못했을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절대 권력의 화신으로 보이던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었다. 민주시민으로서 난생 처음 갖게 된 조그만 승리의 기억. 그렇게 11월의 광장에서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다.

배움의 순간은 때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기도 했다. 예컨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전철에서 말이다. 2016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열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아저씨를 보았다. 온몸을 바닥에 끄시며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치는....... 다리가 없는 그 아저씨는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짚으며 천천히 기어갔다. 열차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가도 마주치기라도 할세라 재빨리 거두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며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매순간 그 존엄성을 헌신짝처럼 내버려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최소한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선진 일류국가, 튼튼한 안보가 뒷받침합니다. 국가정보원은 간첩, 좌익사범, 국제범죄, 테러, 산업스파이, 사이버안보 위협 신고 상담을 위한....... "제기랄, 무엇이 도대체 선진 일류국가란 말인가. 이를 굳게 악물었다. 그 아저씨가 더 이상 "고맙습니다"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의 모든 배움은 사유의 기틀이 되었다. 공부를 거듭해갈수록 삶 깊숙이 뿌리내렸고, 쉽게 시들거나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공부는 대체로 즐거웠지만, 때로 고통스럽기도 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나의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아픔도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시간들을 겪으며 나는 평면이 아닌 입체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더 다양한 삶의 모양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갔다.

만일 내가 학교에 있었다면 스스로 공부의 주인이 되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니다. 그곳에는 주체적 배움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수동적으로 암기하고 받아 적을 뿐. 단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성적을 잘 받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에는 깊이 있는 배움이 부족할 뿐더러 삶에서 유리되기 쉽다. 그렇게 삶과 분리된다면, 그 공부는 이미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공부가 실종된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죽은 지식을 앵무새처럼 암기했을 뿐,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이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공부, 즉 암기와 문제 풀이를 너무도 잘했던 이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막대한 재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남을 속이고 짓밟으며 호가호위했고,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어쩌다 이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 모양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한 공부는 그들의 인생에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성적을 위한 공부, 출세를 위한 공부, 성공을 위한 공부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를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결국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겠는가. 시험으로 배움을 측량하고, 성적으로 공부를 평가하려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한 공부는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 나만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수 있다면, 공부를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마침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