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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르몽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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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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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옹그의 맨땅에 르몽드 읽기'. 처음 이 강의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더랬다. '세상에, 르몽드라니! 그 어렵기로 소문난...... 휴, 나는 언제쯤 르몽드를 읽을 수 있으려나.' 머나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눈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한 단어가 힐끗 눈에 띄었다. 바로 르몽드 앞에 붙은 '맨땅'. 나는 생각했다. ' 그래, 맨땅이라는데 뭐 어때. 한번 부딪쳐보는 거지. 게다가 홍세화 선생님이 하시는 수업이잖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렇게 덜컥 르몽드 수업을 신청하고 말았다.

드디어 수업 첫날.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리고 네 명쯤 지났을까. 나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어졌다. 참가자 대부분이 불어, 불문학, 또는 프랑스 철학을 젊은 시절에 공부했거나, 현재 공부하고 계신 분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막 불어를 시작해 기본 문법을 배우고 있던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이고, 앞으로 민폐만 잔뜩 끼치게 생겼구나.' '맨땅'만을 철석같이 믿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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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습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날이면 두 시간 반 동안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며 결심했다. '그래, 이왕하는 거면 열심히 해보자!' 그때부터 매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꼬박 사흘을 르몽드 숙제에 매달렸다. 특히 금요일은 말 그대로 불타는 금요일. 하루 종일 사전을 붙들고 있어도, 출발 15분 전에야 겨우 숙제를 마치고 헐레벌떡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제야 한 단어, 한 문장에서 벗어나 문단과 행간, 그리고 글 전체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직 토론문과 기고문은 무리였지만, 기사와 사설 정도는 쭉 읽으며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서서히 불어의 묘미를 맛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사를 읽기에 앞서 종종 까뮈의 『이방인』,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엘뤼아르의 『자유』와 같은 글들을 읽었는데, 그때마다 아름다운 문장에 하나씩 밑줄을 그으며 '아, 내가 이 맛에 불어를 배우는구나!'기쁨에 겨워하곤 했다.

특히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읽을 때의 소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악마 섬에 끌려가야 했던 드레퓌스 대위를 위한 최후의 변론, 국가주의의 망상에 사로잡힌 프랑스 사회를 향한 통렬한 외침이자, 꺼져가는 진실을 살려내려 했던 한 지식인의 처절한 몸부림.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졸라는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가 진범이라고 밝히며 진실에 눈감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고발한다. 정치적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참모본부의 장군들, 허위 보고서를 작성해 사실을 날조한 필적 감정사들, 그리고 의도적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린 군사법원을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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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발한 인물들로 말하자면, 나는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원한이나 증오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저 사회적 악행을 보여주는 실체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한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오랫동안 고통받아왔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곧 내 영혼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부디 나를 중죄재판소로 소환하여 공명정대하게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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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군중들에 둘러싸인 에밀 졸라' 앙리 드 그루작

이 글에 담긴 무게만큼이나 이후 졸라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엄청났다. 분노한 군중들이 집으로 찾아와 돌을 던졌고, 끊임없는 살해 협박이 이어졌다. 40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명성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국방부 장관에게 고소를 당해 징역 1년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졸라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상황에 극적인 반전을 일으켰다. 군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반유대주의자들의 반발이 여전히 거셌지만,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하나둘씩 드레퓌스가 진정 범인이 맞는지 의심해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고, 전 세계의 프랑스 대사관은 항의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범인들이 목숨을 끊거나 도주하면서 사건의 본질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결국 드레퓌스는 1906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졸라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고발한다」를 읽는 내내, 나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었다. 문단의 끝과 시작 사이를 메우고 있는 긴박감, 그리고 수많은 마침표에서 묻어나는 비장함이 가슴속에 그대로 전해졌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진실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의 밤을 지새웠을까! 입을 굳게 다물었다면 피해갈 수 있는 폭풍우를 그는 기꺼이 감내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믿는 정의와 진실을 바로세우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지식인'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단지 머리로 아는 것뿐만 아니라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길을 걸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치기 마련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좌절하거나 순응하여 사상적 전향을 감행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식인이 자신의 책무를 저버리는 순간 역사의 수레바퀴는 더디게 굴러간다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훗날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슨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다고, 에밀 졸라처럼 늙어가고 싶다고 「나는 고발한다」를 읽으며 생각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프랑스의 시인이자 언론인 샤를 페기는 말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 Dire la vérité, toute la vérité, rien que la vérité, dire bêtement la vérité bête, ennuyeusement la vérité ennuyeuse, tristement la vérité triste."

르몽드의 창업자 위베르 뵈브메리가 평생 신조로 삼았던 문장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르몽드를 읽으며, 나는 그 이상이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될 수 있음을 보았다. 차갑지만 따뜻한 시선, 격정적이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는 문체, 격의 없는 토론과 시의적절한 기고문. 옳고 그름, 선과 악,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넘어 배려와 나눔, 연대와 공존, 그리고 진실을 최우선으로 삼는 신문. 이러한 논조가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은 결국 매출 중 구독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광고 수입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르몽드는 언론인과 프랑스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온 신문인 셈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르몽드를 읽어나가려 한다. 시대를 읽는 또 하나의 눈을 기르는 것. 한국 또는 미국의 시각으로 섣불리 세상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르몽드 읽기가 가지는 함의일 것이다.

동시에 한국 언론을 향한 끈도 놓지 않으려 한다. 지난 2016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다. 언론의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언론의 근본적 생태계가 변화해야 하고, 이는 독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때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언론은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 독자는 독자의 역할을 다하는,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