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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겨울, 『전태일 평전』을 처음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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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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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저녁, 조금 특별한 선물을 하나 건네받았다. 궁금한 마음에 포장을 뜯어보니 표지를 드러낸 한 권의 책. 그 맨 앞 장에는 조그만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싶었어. 그만큼 울림이 있는 삶이자 책인 것 같아. 하영이에게 종찬 형이.'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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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처절한 고뇌의 단 한 조각이라도...

그날 밤 책을 집어 들자마자,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을 든 두 손은 부르르 떨렸고,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졌다. 전태일, 그가 살아야했던 그리고 살기로 했던 삶은 강렬하고 또 충격적이었다. 그 삶의 무게와 깊이를 목도하며 한없이 가벼운 나의 삶을 반성했다. 과연 전태일의 삶을 이끌어온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는 분노하고 또 고뇌했다. 그 처절한 고뇌의 단 한 조각이라도 나는 과연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부끄러움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윽고 해가 바뀌어 중학교 3학년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전태일의 삶이 내 삶에 남긴 흔적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글은 전태일청소년문학상 독후감 부문에 당선되었다. 시상식은 경향신문사에서 열렸다. 시상식장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지만, 그래도 전태일을 기리는 상을 받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 드디어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수상 소감을 말하고, 상장을 받고, 부상으로 또 한 권의 『전태일 평전』을 받았다.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면 생각에 잠긴다. 『전태일 평전』을 누구한테 선물하는 것이 좋을까? 안타깝게도 몇 년이 지나도록 맞춤한 사람을 찾지 못해 그대로 책꽂이에 꽂혀 있다. 그래도 한번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나보다 손아래인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 받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인생을 다시 되돌아본다면, 또 독후감을 써서 상까지 받는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부상으로 받은 또 한 권의 『전태일 평전』을 자기보다 어린 친구에게 크리스마스에 선물한다면. 그런 일이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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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10. 독후감 '내가 만난 전태일' 중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사른 지도 벌써 43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전태일과 여공들이 일하던 평화시장은 이제 청계천이 흐르는 거리로 탈바꿈하였고, 그 주변에는 전태일 동상과 전태일 다리도 생겨났다. 노동자들의 처지도 비교적 많이 나아졌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리해고 노동자 복직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무고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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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태일이 살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43년 전 전태일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얼마 전에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을 벌이는 철도노조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의 요구도 43년 전 전태일이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소박했다. 그분들의 가장 큰 요구는 "우리에게 노동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고, 이 말은 곧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좀 사람답게 살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고, 그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43년 전 전태일은 이런 세상을 꿈꾸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는 세상,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평등한 세상. 그러나 이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전태일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