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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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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에 태어났으니 나와 태어난 해가 같다. 〈뿌리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된 건 1980년. 그때 나는 불과 다섯 살이었으니 그 잡지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다. 내가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에 대해 알게 된 건, 그 잡지의 마지막 발행일로부터 34년이나 지난 2014년 초의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좀 풀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내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으신다. 책깨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어머니는 책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신다. 한번은 어머니가 나와 통화중에 헌책 수집가 박균호 씨가 쓴 〈오래된 새 책〉을 읽은 이야기를 했다. "이 사람은 절판본이나 희귀본을 수집하는 사람인데 헌책을 3,000권쯤 모았다네. 그런데 이 사람 말이, 천재지변이 나거나 집에 불이 나거나 해서 그 많은 책 중에서 단 한 권만을 들고 나와야 한다면 자기는 1초만에 선택할 수 있다는 거야. 그 책 이름이 〈숨어사는 외톨박이〉래. 내가 그 대목을 읽다가 가만, 싶은 거지. 그 책은 나도 읽었고 우리집에 있을 텐데 싶어서 책장을 훑어봤더니 진짜로 있더라고. 나도 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 그 귀하다는 책이 우리집에 있었군."

몇 달 뒤 부산에 있는 본가에 가서 며칠 묵는데, 뭐 읽을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 그 얘기가 떠올라서 어머니께 그 책을 찾아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건네준 책은 출간된 지 30년도 더 된, 종이가 바스라질 듯 누렇게 바랜 책이었다. 심상찮은 것은 옛날 책답지 않게 만듦새와 디자인이 무척 세련되고 단단해 보이는 점이었다. 낡은 책 냄새를 맡으며 첫 장을 넘긴 나는 그만 새벽까지 그 책에 푸욱 빠져들어 버렸다. 그것은 이상한 이야기들이었다. 거기엔 이 땅과 이 도시가, 빌딩숲의 세계가 아니라 아직 흙과 뱀과 귀신의 세계에 속했을 무렵의 기묘한 힘이 서려 있었다. 유능한 필자들이 매우 정연한 방식으로 담아낸, 실제로 있었던 이 이상한 이야기들은 나를 꽉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 책을 만든 곳이 바로 출판사 〈뿌리깊은 나무〉였다.

나는 나를 비범하게 사로잡은 이 이상한 책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뿌리깊은나무 출판사는 같은 이름의 잡지로 이름났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잡지의 발행인이자 출판사 대표가 바로 한창기라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읽으며 점점 호기심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차에, 전남 순천에 그를 기리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뭐에 씐 듯이 집을 나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순천을 향했다. 참고로 나는 실행력 따위란 없는 사람으로, 연애할 때 빼고는 이런 일은 평생 처음이었다.

박물관은, 눈 매서운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봤다면 잔소리깨나 늘어놨을 성싶게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비롯해 동명의 출판사가 이루어낸 다양한 성과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디자인의 완성도가 대단하고 기획이 참신해서 눈길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1970-80년대의 산물이라니 믿기가 어려웠다. 또 박물관은 한창기가 모은 6,500여 점의 유물도 전시해 두었다. 한창기는 심미안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남달랐고, 열정적인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금장이나 옥 장식 같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드라운 질감의 토기나 수막새, 앙증맞고 광택이 그윽한 백자 등 골동품에 지식이 없는 나도 자꾸만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들이었다. 한창기식 표현에 따르면 '잔소리 없는 것' '세월이 검증한 것'의 매력이었으리라. 나는 그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켠에서 재밌는 전시품들을 마주쳤다. 한창기의 물건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건 그가 생전 착용했던 시계들이었다.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메가, 예거 르쿨트르, 불가리, 지라르 페르고, 까르띠에... 이건 뭐 세계 명품시계 순위표를 보는 줄 알았다. 브랜딩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밖에. 그 최고급 시계들은 하나같이 우아하고 만듦새가 무척 뛰어나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참 즐거웠다. 그는 과연 당대 최고의 멋쟁이였던 것이다. 조선호텔 양장점에서 근사한 소재로 수트를 정확히 맞춰 입고 파란색 컨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비싼 옷을 번드르르하게 자랑하는 하수가 아니라 옷을 정말로 사랑하고 반듯하게 갖춰 입기를 즐기는 진짜 멋쟁이 신사였던 모양이다. 옷차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극해서, 라펠의 폭에 대해 주의 깊은 연구를 하는가 하면, 양말과 바짓단 사이에 속살이 보이지 않도록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양말을 구두 색깔에 맞춰 신고 다녔다고 한다. 남자들이 양복바지 밑에 흰 스포츠양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다니던 그 1970년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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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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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나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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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그는 멋이 흐르는 양복쟁이이기도 했지만 한복에도 유난스러웠다. 다듬이질해서 윤이 나는 손명주를 옛날식으로 바느질하는 장인에게 맡겨서 바지 저고리부터 두루마기까지 속속들이 제대로 지어입었던 그다. 동정이니 대님 하나까지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한껏 멋을 부린 사진 속 그의 모습들은 양복차림이든 한복차림이든 지금 봐도 참 세련되고 근사하여 눈이 즐겁다. 그는 동서양과 옛날 오늘날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가죽의자 옆에 가야시대 토기가 놓여 있곤 했다. 당시는 '인테리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때였다.

그것이 바로 전설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힘이 아니었을까 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젊은 시절 이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로 세일즈맨의 신화를 이룬 한창기 사장이 '내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던' 잡지였다. 〈뿌리깊은 나무〉는 하나에서 열까지 혁명적이었다.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은, 신바람이 난 한창기 사장이 잡지로서는 망할 짓만 골라서 했다며 무려 열여섯 가지의 망할 짓을 꼽은 바 있다. 제목이 네 글자를 넘으면 망한다. 제목을 한글로 달면 망한다. 가로쓰기를 고집하면 망한다. 두툼하지 않으면 망한다. 부록을 곁들이지 않으면 망한다. 한글 전용이면 망한다. 연재물이 없으면 망한다... 등등, 당시 잡지계에서 하지 말란 짓은 죄다 해버린 잡지가 바로 〈뿌리깊은 나무〉다.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는 4년 남짓 발행되는 동안 우리나라 잡지의 역사를 모조리 다시 쓰며 굉장한 성공을 거둔다. 8만 부를 훌쩍 넘게 찍었으니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월간지 부수의 두세 배쯤 팔린 셈이다. 망할 짓만 골라 하는 한창기의 행보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돈키호테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하나하나가 당연한 짓이었다. 그는 튀어 보이기 위해, 다르기 위해 다름을 추구하는 짓을 혐오했다. 그가 일평생 추구한 것은 그의 까탈스런 기준에 맞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우리말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영어를 신기할 정도로 잘해 외국 한번 안 나가고도 브리태니커 본사의 부사장이 깜짝 놀라 '한창기는 동양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지만,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상을 풀어놓기에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말과 글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는 국어학자 뺨칠 정도로 우리말글의 어법과 문법에 탁월했으며, 한자어와 일본어의 영향으로 우리말글의 고유함이 훼손된 걸 깨끗이 걷어내고자 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이름에 대해, 그는 창간사에 이렇게 썼다.

'좀 엉뚱해 보이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뜻이 넓을수록 훌륭한 이름으로들 치는 터에, 굳이 대수롭잖은 '나무'를, 더구나 뜻을 더 좁힌 '뿌리깊은 나무'를 이 잡지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우선 이름부터 작게 내세우려는 뜻에서 그랬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 겨레가 우리말과 우리글로 맨 처음으로 적은 문학작품인 〈용비어천가〉의 '불휘기픈남간...'에서 따왔습니다.'

한창기는 남의 것을 무턱대고 모방하려 하지 않았고 우리 것이라 해서 무조건 고집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사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을 찾아내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가장 정제된 우리말을, 가장 선진적인 편집 디자인을 도입해 가장 유려하게 드러내 보였다. 그는 잡지란 무릇 어때야 한다는 그 어떤 당위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한자어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가로쓰기이며, 최초로 전문 사진가를 기용해 극도로 아름다운 사진을 싣고, 이 땅에 아트디렉션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 최초로 아트 디렉터를 영입해 지금 봐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교한 레이아웃을 만들어 냈으며, 타이포그래피를 새로 개발해 제호에 적용한 혁명적인 잡지는 그렇게 한창기와 똑 닮은 꼴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 잡지는 너무 빨리 갔다. 80년 5월 광주를 짓밟았던 전두환 정권은, 세련되고 도도하게 할 말을 하던 그 당돌한 잡지를 하루아침에 폐간시켜 버렸다. 1980년 8월호가 마지막이었다. 그 잡지와 똑 닮은 사람, 한창기도 너무 빨리 갔다. 그는 1997년, 겨우 예순한 살에 병을 얻어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그가 숨질 때까지 나는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건만, 한창기는 나의 영웅이 되어 있다. 그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만든 똑소리 나는 출판물들과 이런저런 기록으로 더듬어본 그의 생애는 지금도 내게 큰 영향을 준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렇게 나에게로 가지를 뻗어온다.

나는 이 멋스런 고집불통 사내가 정말로 고맙다. 정교한 만듦새와 아름다운 디자인에 기꺼이 가치를 지불하는 사람이었던 게 고맙다. 아름다운 우리 것을 잘 알아보고 그것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전하려 했던 그 태도가 고맙다. "때론 돈을 낙엽처럼 불태울 줄도 알아야 한다."던 그가 모아놓은 6500점의 유물이 고맙다. 그가 명창들에게 한복을 지어 입혀 가며 만든 100장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음반이 고맙다. 그가 쓴 맛깔나는 문장들이 고맙고, 그가 남긴 잡지들이 고맙고, 그가 세상에 둘도 없는 멋쟁이였던 게 고맙다.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남자가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시간을 머금은 보드라운 질감의 토기를 들고 찬찬히 들여다 보다 한두 번쯤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손목엔 파텍 필립을 차고 말이다.


* 이 글은 〈안녕 돈키호테〉(민음사, 2017)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