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장하나 Headshot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이가 '테레비' 타령을 시작했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chemistry

장하나 전 의원의 31개월 된 딸 두리가 놀러 간 숙소에서 텔레비전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장난치고 있다. 두리는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을 켜 달라고 엄마한테 요구했다. 두리가 좀더 많이 뛰어놀기를 바라는 엄마는 집 안에서 텔레비전을 없애려고 마음먹었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아이를 키우다 보니 부부싸움이 참 잦습니다. 다른 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아이 키우는 일' 때문에 싸우게 되더군요. 의원 임기 중에 두리를 낳은 터라 처음 일년은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독박육아를 해야만 했습니다. 낙선한 뒤로는 남편과 제가 각각 주 3일씩 일하며 평등육아를 하고 있고요. 그런데 의외로 '독박'일 때보다 '평등'이 된 후에 더 자주 싸웁니다. 마치 한 사람은 못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함께 하니까 외려 일이 더 안 되는 느낌? 크고 무거운 밥상은 두 사람이 드는 게 훨씬 낫지만, 밥 차리는데 쟁반 하나를 둘이 들어 나르는 느낌? 집에 불이 났는데 2인3각으로 대피해야 하는 바로 그런 느낌!

두 사람이 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엄마와 아빠가 각기 고유한 인격체임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혹시 육아는 평등이 아니라 독박이 맞는 거 아냐?' 하는 말풍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하죠. 물론 이내 고개를 젓습니다. 평등육아의 문제가 사소한 부부싸움의 연속이라면 독박육아는 '그래서 누가 독박의 짐을 질 것인가?'라는 엄청난 갈등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법과 제도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여건이 '독박은 엄마 몫'이라고 점지해줍니다. 아빠들도 큰 죄책감 없이 일터로 갈 수 있는 거죠. 하지만 대한민국 아빠들이 육아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서 행복한 건 절대 아닙니다. 사실 참 딱한 존재들이죠. 갓난아이가 자라면서 보여주는 찰나의 아름다움, 뜻밖의 감동들을 죄다 놓치는 건 한국 아빠들이 치르는 가혹한 대가입니다.

티브이 없애려고 결심

다시 부부싸움 이야기로 돌아와서, 엄마 아빠가 함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꾸 부딪히는 건 피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두리가 자라서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은데, 그래서 지금 당장 뭘 해야 되는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는 잘 몰라요. 정해진 답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두리 아빠와 두리 엄마의 판단은 자주 엇갈리고, 각자 자기가 더 옳다고 고집합니다. 육아 때문에 몸이 힘드니까 참을성은 금세 사라지고 어느새 또 티격태격하는 거죠. 그래서 걸핏하면 평행선을 달립니다. 두리가 어서 자라서 심판을 봐줬으면 좋겠네요. 십년만 기다리면 되겠죠?

두리 밥 때문에 싸우고, 두리 잠 때문에 싸우고, 두리의 떼쓰기 때문에 싸우고, 젖병, 공갈 젖꼭지 때문에 싸우고.... 소재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요즘엔 텔레비전이 뜨거운 감자죠. 두리가 티브이를 너무 많이 봐서 아빠는 화가 났고, 엄마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이런 온도차 역시 부부싸움의 원인인가 봅니다.) 저는 두리가 만화에서 보고 배운 단어(혹등고래, 가시복어, 붉은 성게, 공생관계 등)를 말하는 것도 신기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너무 재밌어서 티브이를 아예 끊기는 싫었죠. 31개월 된 아기에게는 '조금만 보자, 그만 보자, 내일 보자' 이런 말이 통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4~5일 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리가 아침에 눈뜨자마자 '엄마, 테레비 보여줘. 테레비!' 하고 울듯이 땡깡을 부리는 겁니다. 지난주까지는 잠에서 깨면 천사 같은 표정으로 '엄마, 안녕?' 하고 생글생글 웃던 우리 딸이 일어나자마자 '테레비' 타령이라니.... 덜컥 겁도 나고, 이제 결단의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hemistry

장하나 전 의원의 딸 두리가 엄마 휴대폰을 가지고 놀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2014년에 연구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영유아들이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접하는 나이가 0.84살인 것으로 나타났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엄마들에게 티브이나 스마트폰은 사실 구원투수 같은 존재입니다. 빨래나 설거지, 청소할 때 잠시 아이를 봐주는 베이비시터이고, 식당에서 마트에서 공공장소에서 맘충 신세를 모면하게 해주는 신비의 묘약이죠. 그렇게 고맙고 요긴한 티브이를 이제 없애야 하나 봐요. 마음을 먹고 나니, 많게는 하루에 몇시간씩 티브이를 보여주던 제 자신이 부끄럽고 후회되네요. 지난 연재글 중에서도 밝힌 적 있지만, 저는 두리가 '먹는 일' 그리고 '뛰어노는 일'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반면 두리가 접하는 만화·동영상에 대해선 너무나 무책임한 엄마라는 걸 부정할 수 없네요.

국무총리 산하 육아정책연구소가 2014년 발표한 보고서 <영유아 스마트폰 노출 실태 및 보호대책>을 보면 2010년쯤부터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되었는데, 2011~2013년에 태어난 영유아의 스마트폰 최초 이용 연령은 평균 0.84살이라고 합니다. 즉 이제 아이들은 첫돌이 되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한다는 얘긴데요. 저도 두리 첫돌 무렵에 슬쩍슬쩍 보여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울고 떼쓸 때 그만한 약이 없기에,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나 다름없죠. 어릴 때는 색과 모양과 움직임과 멜로디가 두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겠지만, 말문이 트이고 나니 두리가 만화의 서사를 나름대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감정이입도 깊어지는 게 느껴집니다. 이제 아무거나 보여주면 안 되는 시기가 찾아온 거죠.

어린이 만화는 자체 심의도 안 해

자연스레 두리가 즐겨 보는 <교육방송>(EBS) 프로그램을 눈여겨보게 됐습니다. 제 어린 시절 교육방송은 정말 재미없는 방송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요새 두리와 함께 티브이를 보다 보니 이제 교육방송은 어린이 프로와 만화를 많이 편성하는 재밌는 방송이 되었더군요. 그 유명한 뽀로로도 방송하고요. 하지만 '정치하는 엄마'의 눈으로 살펴본 공영방송 이비에스는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분홍색 수달 루피가 친구들에게 매일 먹을 것을 만들어주는 걸 보면, 미래를 살아갈 우리 두리에게 저런 상투적인 성역할을 보여줘야 하다니,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 그나마 뽀로로는 나은 편입니다. <소피 루비>와 <플라워링 하트>는 너무 큰 눈에 너무 마른 체형을 가진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재래식' 미인이죠. 아직도 저런 성역할과 미의 기준(?)이 통용되는지 솔직히 한숨이 납니다. 케이블 채널도 아닌 교육방송에서 저런 만화들을 편성하는 게 쉽게 납득이 안 됐죠.

확인해보니 교육방송은 위 두 작품을 구입만 한 게 아니라 제작부터 참여했더군요. 투자를 했다는 건 수익을 기대했단 뜻이죠. 돈이 된다면 외모에 대한 어린이들의 가치관이 비뚤어져도 된다는 건지 교육방송 쪽에 묻고 싶네요. 2015년 5월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가 공동 발표한 <아동의 행복감 국제 비교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어린이들이 느끼는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가 영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물론 네팔, 에티오피아 등에 비해서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외모, 신체, 학업 성적에 대한 만족감도 대상 국가 중 점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죠. 대체 누가 아이들에게 '넌 못생겼어!' 하고 지적한 것일까요? 어린이들이 동경하는 아이돌 연예인이나 만화에 등장하는 너무나 마른 인물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그릇된 외모관을 심어준 건 아닐까요?

교육방송의 방송편성규칙을 찾아 읽어 보니, 여전히 '장애자'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오랫동안 정비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인권 옹호에 대한 부분도 내용이 추상적이라서 방송 제작과 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수준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교육방송 프로그램을 자체 모니터링하는 시청자위원회 회의록을 2014년 것부터 봤는데, 만화에 대해서는 한번도 심의하지 않은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chemistry

장하나 전 의원의 딸 두리가 집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에 색연필 등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31개월 된 두리는 어느새 어린이 프로그램의 얘기 흐름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텔레비전에 몰입하는 양상이 심해졌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왜 만화에 이렇게 관대할까요? 아니 만화 제작과 편성에 있어서는 마치 자기 부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일까요? 만화를 팔고 사는 시장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일지 모르죠. 만화에 등장하는 건물과 소품은 이미 똑같은 모양의 장난감을 제작, 판매할 것을 전제로 기획됩니다. 가까운 대형할인점이나 문구점에 가면 만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사용한 물건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게다가 <뽀롱뽀롱 뽀로로> 방송 직후에는 뽀로로 장난감 광고가, <소피 루비> 다음에는 소피 루비 장난감 광고가 등장합니다. 한 편의 만화는 장난감과 과자, 책, 교재, 문구, 옷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아이들을 포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가게에서 그런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면 아마 그게 더 이상하겠죠.

물론 광고와 관련한 규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 내용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방송법 제73조 제1항에는 '방송사업자는 방송광고와 방송프로그램이 혼동되지 아니하도록 명확하게 구분하여야 하며, 어린이를 주 시청 대상으로 하는 방송프로그램의 방송광고시간 및 전후 토막광고시간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반드시 광고임을 밝히는 자막을 표기하여 어린이가 방송프로그램과 방송광고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화면 한켠에 '광고방송'이라고 쓴 자막이 그것입니다. '광고'라고 표시만 하면 아이들의 구매 욕구가 억제될 거라는 전제에 선뜻 공감하는 엄마가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떼쓰고 조르는 아이를 보면, 엄마가 아이 버릇을 망쳤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말아야겠어요. 성격이 나쁜 아이라고는 더더욱 생각 마시고요. 이 모든 건 교육방송을 포함한 어린이 방송(만화) 채널들과 적절한 규제를 하지 않은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입니다. 절제력이 없는 아이들의 욕구를 이용하는 어른들이 문제입니다. 이를 바꾸려면 역시 엄마들이 나서야 합니다. 만화를 포함한 어린이 방송의 내용도 바꾸고, 아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광고의 범위도 고민해 봐야죠.

여성가족부의 가이드라인 준수해야

영국의 공영방송인 <비비시>(BBC)의 경우 '에디터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여성, 소수민족, 장애인 등의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방송에서 사용하던 'firemen'(파이어맨·소방관)이라는 표현을 'firefighters'(파이어파이터스)로 변경했다는데요. 그런 작지만 실질적인 변화가 우리에게도 절실합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는 방송통신심의원회 심의규정 제30조(양성평등)에 따른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과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양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가 그것인데요. 이게 교육도 제대로 안 되고 구속력도 없어서 공영방송들조차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특히 여성가족부나 인권위원회가 실시하는 방송 모니터링에서도 어린이 프로그램은 거의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엄마 모니터링단을 발족해야 하나 싶을 정도죠.

교육방송 방송강령 전문을 보면 '우리는 전문 교육방송인으로서,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은 물론 사회교육 등 평생교육의 수임자요, 선도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육방송이 제작하고 있는 좋은 방송 프로그램들을 볼 때, 저는 지금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팔리는 만화를 만들어서 아이들 상대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만 버리면 됩니다. 오히려 만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일깨워주고, 다양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편성하는 모든 분들께 부탁합니다. 방송에서 묘사하는 성역할이나 나이, 민족, 직업, 빈부, 장애·비장애 등 차이에 대한 차별적 고정관념은 어른들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세요. 법과 제도는 엄마들이 바꾸겠습니다. 정치를 통해서 말이죠.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