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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충은 노키즈존에서 나가라'는 당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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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나의 엄마정치] ⑫ 노키즈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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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두리가 잠든 상태였기에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를 동반한 여행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히 식사하는 소위 '골든타임'이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전 국토가 이미 노키즈존인데 그걸 또 써 붙이기는.... 당신들만 불편한 줄 아나? 나도 불편하다고!'

새삼스러운 '노키즈존 논란'에 대해 제 의식은 다소 냉소적으로 반응하더군요. 논란을 다룬 기사도, 댓글들도 볼 마음이 안 생겼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치 제3자인 양 논란을 관망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죠. 억압과 폭력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처음의 자연스러운 분노와 저항은 사라지고 어느새 부조리한 상황에 적응하고 마는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길들여지는 것을 '순치'된다고 하더군요. 환경운동과 동물권 관련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단어입니다.

나, 왜 갇힌 코끼리가 됐을까

야생의 코끼리가 우리(케이지)에 갇힌 삶에 적응하고 코끼리쇼를 하기까지, 얼마나 잔인한 순치의 과정을 겪는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거든요. 노키즈존에 단지 냉소할 뿐 남들처럼 분노하지 않는 제 정신상태가 가엾게 느껴졌습니다. 야생의 삶을 살던 장하나는 두리 엄마라는 케이지에 갇힌 지 고작 30개월 만에 이렇게 순치되고 만 것일까요?

노키즈존은 '정치하는엄마들' 커뮤니티 안에서도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저는 뒤늦게야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죠. 머리로는 '틀렸다'고 말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노키즈존을 선언한 상점 주인들이 이해되기도 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가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노키즈존에 반대하지만, 노키즈존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틀린 건 아니다.' 이 명제는 참인가요, 거짓인가요? 거짓이라면 제 안의 오류와 모순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저희 가족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지만, 이따금 공항 식당을 이용하거나 부모님 생신을 맞아 외식을 할 때 두리가 먹은 자리가 얼마나 어질러지는지 잘 압니다. 하루 세번 아이가 밥을 먹은 자리는 늘 전쟁터이고, 하루 세번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일도 늘 전쟁 같습니다. 식당이라고 두리가 달라질 리 없죠. 지금은 두리가 좀 커서 어른밥을 잘게 잘라 먹일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외출할 때마다 두리밥(이유식)을 준비해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 밥만 주문하고 두리밥은 식당 직원분에게 전자레인지로 데워 달라고 부탁하게 되죠.

아직까지도 두리 먹는 양이 어른만큼은 안 돼서 두리 몫의 1인분을 더 주문하지 않고 엄마·아빠와 나눠 먹는데요. 그것도 눈치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고맙게도 대부분의 식당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두리를 위한 여분의 그릇과 포크를 제공해주는데, 그래서 더 미안해지는 거죠. 그러다 두리는 집에서처럼 이내 소란을 피우고, 그걸 저지하는 저는 덩달아 소란스러워집니다. 결국 식당 사장님과 직원분들은 물론 다른 손님들한테까지 미안해지죠. 그 전까지 내 자신은 '맘충'이라 불릴 만큼의 진상 고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는 틀림없는 '맘충'이네요.

온라인상의 노키즈존 논란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 몫의 김밥이나 달걀프라이를 공짜로 요구하는 엄마'나 '아이가 소란스러운데도 저지하지 않고 수다만 떠는 엄마' 등 심각한 사례들이 주로 인용되고, 마치 '맘충=진상(블랙컨슈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전제가 깔립니다. 그리고 이런 진상 고객의 횡포로부터 사장님들도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뒤따르죠.

그러나 이런 찬성파의 논리에는 결함이 있습니다. 저처럼 아이하고 밥 나눠 먹는 엄마는 흔할지 몰라도 아이 몫의 공짜밥을 요구하는 엄마는 정말 흔치 않습니다. 즉, 출현 빈도가 매우 낮은 '중증의 맘충'을 막기 위해 노키즈존을 설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는 맘충은 바로 저 같은 보통의 엄마입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시끄럽고, 그걸 저지하다 보면 보통의 엄마들이 더 시끄러워지죠. 노키즈존은 그런 보통의 엄마와 아이들을 막기 위한 장치일 뿐, 공짜밥 엄마나 아이 방치 엄마 때문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보통의 엄마들은 공짜밥을 요구하진 않지만 아이 밥을 데워달라거나 아이 그릇을 달라는 등 공짜의 추가 서비스를 요구하고, 보통의 아이들은 식탁을 초토화시키죠. 즉, '맘충=진상'이 아니라 '맘충=엄마'입니다.

그러니 맘충과 '개념맘'이 따로 있는 것처럼 분리하는 것도 가짜 프레임이고, 노키즈존은 개념맘이 아닌 맘충만을 막는 장치라는 설정도 가짜죠. 또한 일부 맘충 때문에 개념맘까지 피해보는 상황이라는 것도 사실 왜곡입니다. 아이 데리고 식당에 오는 순간 보통의 엄마들은 맘충이 되는 거고, 노키즈존은 그래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개념맘이 되기 위해서는 식당에 가질 말아야 합니다.

'맘충=진상' 프레임의 문제

그러나 저와 두리가 민폐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니까 우리는 문전박대 당해 마땅한 것일까요? 또는 공공의 질서를 위해 저와 두리는 자발적으로 문전박대를 선택해야 되는 건 아닐까요? 두리가 적어도 48개월이 되어 본인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지 헤아리고, 그 점을 행동에 반영할 줄 알 때까지는 식당이나 카페에 안 가고 여행이나 고향 나들이를 삼가는 게 옳지 않을까요? 제가 '두리야,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하자' 이렇게 말하면 두리가 가만히 있고 조용해지는 그날까지 대략 만 4년 정도 참으면 된다는데....

이러면 노키즈존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요? 노키즈존 찬성하는 분들은 이런 결론에 만족하십니까? 키즈카페와 같은 전용 공간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요? 노키즈존보다 그렇지 않은 식당·카페가 많은데 마치 추방당하는 것처럼 오버하지 말라고요?

그러나 노키즈존이 지금처럼 확산된다면, 우리는 출입 가능한 식당이나 카페에 갈 때마다 고마움을 넘어선 '황송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건 부당한 일입니다. 지난 30개월 동안 절감한 것 중 하나는 두리랑 외출하는 게 너무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그냥 집에서 아이 보는 것도 늘 정신 사나운 일인데, 대형할인점·백화점 빼고는 엄마와 아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없는 사회에서 아이와 외출한다는 것은 진이 다 빠지는 일입니다. 늘 부탁해야 하고, 늘 구걸해야 하고, 결국 뻔뻔함만 남아서 남들이 보건 말건 아무 데서나 기저귀를 갈 수 있는 맘충이 되어 가죠.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노키즈존을 대면하니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분노가 자연히 폭발합니다. 만약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아빠들을 비하하는 '파파충'이란 혐오 표현이 '맘충'만큼 널리 쓰인다고 합시다. 아빠 입장에서도 '평등육아가 옳은 건 알지만, 맨날 야근인데 아이를 어떻게 보나? 칼퇴근이나 시켜주고 욕을 해라.' 이런 생각 안 들겠습니까? 화가 나겠죠. 애 안 본 건 내(아빠) 잘못 맞지만, 그래도 억울하고 억울하니까 화를 내야죠.

많은 한국 엄마들은 아직도 아이를 낳고서 일자리를 잃습니다. 2016년 7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발표한 '2015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첫째아이 출산 전후 6개월간 취업 중이었던 기혼여성의 경력단절률은 평균 44.6%입니다. 공무원, 국공립 교사는 11.2%, 민간기업 종사자는 49.8%, 비정규직 노동자는 71.1%이니까 경력단절에도 심각한 양극화가 존재하죠. 즉, 공무원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엄마들 두 명 중 한 사람은 '경단녀'란 말입니다. 엄마가 되는 동시에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절반 정도 상실하죠. 그리고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남은 반쪽마저도 서서히 잃어버립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게 너무 고되어서 친구나 선후배들을 만나지 않다 보면 어느새 사회적 관계는 파탄이 나죠. 공연이나 전시회를 보러 갈 수도 없고, 봄꽃도 단풍도 계절도 시간도 서서히 엄마의 삶에서 빠져나갑니다. 굳이 노키즈존에 와야겠느냐고, 키즈카페에 가보라고 말들 하지만, 이미 엄마들은 키즈카페에 질리도록 가고 있습니다. 엄마들은 어린이 뮤지컬과 어린이 전시회를 보고, 아쿠아리움·테마파크·워터파크를 섭렵하고 휴가 때에도 어린이 펜션에 묵죠. 오래지 않아 '나'는 없어지고 'ㅇㅇ 엄마'만 남습니다.

엄마가 맘충이 되는 것은 내 새끼밖에 모르고, 내 아이에게 오냐오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엄마라는 케이지에 감금된 그들의 자아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엄마들도 밖에 나오면 수유실이나 기저귀 교환대가 없다는 거 잘 압니다. 내 아이가 아직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나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엄마들이 민폐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기저귀를 갈고 알량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떠는 것은 '개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엄마들은 그 모든 민폐가 무색할 정도로 절박합니다.

우리를 욕하기 전에 엄마가 잃은 것들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공공의 질서를 지키라고 훈계하기 전에 편의시설은 있는지, 시간제 보육시설은 있는지, 아니면 엄마들은 집에만 있으라는 것인지, 당신들의 요구사항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돌아보기 바랍니다. 맘충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우리 모두가 한충(韓蟲)이었던 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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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은 그야말로 긴장의 공간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잡아야 하는 부모. 괜찮다며 너그럽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이도 있다. 이륙 전 비행기 실내 전체를 질주하던 두리.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민폐가 무색하게 엄마들은 절박하다

제가 바라본 노키즈존 논란의 양상은 찬성과 반대 두 입장이 서로를 끊임없이 설득하기 위해서 모든 합리적인 근거를 총동원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맘충의 사례들이 총망라되었고, 노키즈존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선진국의 사례도 망라되었습니다. 노키즈존은 유색인종 출입금지, 장애인 출입금지, 유대인 출입금지와 마찬가지로 엄연한 차별이고 인권유린이라는 주장도 있고, 사업주의 영업권과 자유로운 상행위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끼리 설득해야 할까요? 노키즈존은 '예스 오어 노'(Yes or No)의 문제일까요? 시민들 간의 토론은 충분히 영글다 못해 과열된 지 오랜데 정부와 정치권은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는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여성가족부가 논의를 이끌고, 차별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영업권에 대해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현실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아야죠.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국회도 당연히 노키즈존을 둘러싼 시민들의 논쟁과 토론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두 시간만이라도 아이들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단시간 (공공)보육시설이 있다면, 또는 시간제 아이돌봄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면, 엄마들도 당연히 잠시 아이와 떨어져 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도 당신처럼 평화롭게 차 한 잔을 마시고 어른들 간의 대화를 즐기고 싶습니다. 선진국에 노키즈존이 없는 이유는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을 엄격하게 훈육하는 문화나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회 인식이나 문화 이전에 복지제도와 예산, 즉 정치가 문제인 거죠. 주민센터, 지하철역 같은 공공시설과 대규모 상업시설 그리고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마다 엄마와 아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설치돼 있다면 저도 아무 데서나 두리 기저귀를 갈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정말 맘충이 사라지기 바란다면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이 지켜지도록 정부를 압박해야 합니다. 엄마의 절반이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거, 그거야말로 적폐 아닌가요? 법만 지켜져도 엄마들이 카페에서 민폐 끼칠 시간에 당신들처럼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그렇게 안 보였겠지만, 당신처럼 배울 만큼 배우고 일도 할 만큼 하는 사람이었답니다.

법대로 평등육아도 실현해야죠. 그러면 맘충이 줄어드는 만큼 파파충이 늘어나겠죠. 아니면 부모충이나 엄빠충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너도나도 모두 벌레가 되는 게 아니라, 엄마·아빠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을 거라는 믿음이죠.

제 딸 두리는 제 것이 아닙니다. 두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고, 세계시민이고 미래세대죠. 제가 우리나라 출산율을 제고하기 위해 두리를 낳은 건 아니지만, 두리는 2015년에 태어난 국민 43만8400명 중 한 사람이고 당연히 2015년 출산율 통계에 포함되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내 새끼, 네 새끼'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입니다.

노키즈존 문제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우리 아이들은 단지 부모가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봤으면 합니다. 과연 남의 자식인 우리 아이들에게 '노'(No)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노키즈존을 무조건 반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노키즈존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무거운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노키즈컨트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