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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만원 아동수당은 차라리 거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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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나의 엄마정치] ⑨ 엄마들의 '경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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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돕기 위해 왕복 약 4시간을 마다하지 않는 두리의 할머니·할아버지. 한국 사회의 보육에서 조부모 의존도는 높은 편이다.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는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가족'에 대해서도, 그것이 주는 속박과 개인의 부자유에 고민이 많았죠. 저는 어린 시절부터 홀어머니의 외딸로 단출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가족-친족에 대한 경험과 감각이 남들보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이 컸죠. 그래서인지 머리로는 공동체 하면 막연히 좋은 것이겠지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공동체는 왠지 답답한 것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거대도시가 부여하는 익명성은 외로움보다는 자유로움이었습니다.

공동체 또는 관계망이라는 것에 무관심하던 제가 아이를 낳고 180도 달라졌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가족의 도움은 너무 절실한 일이었고, 또한 아이는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크나큰 기쁨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죠. 저는 아이를 늦은 나이에 낳은 만큼 가족의 소중함도 너무 뒤늦게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도움이 지나치다 못해 가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한국의 육아 현실은 문제가 심각합니다.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의존하는 육아는 죄책감이 너무나 크고,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경력단절 외에 답이 없다는 게 문제죠. 아이를 기르는 일은 가족 공동체의 역량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진리죠. 아이에게는 마을 공동체, 지역 공동체, 국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두리를 위해, 제가 한국 사회에서 이미 해체돼버린 공동체와 공동체 의식을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복원할 수 있을까요? 두리에게 공동체를 만들어주고픈 바람은 깨끗이 포기하는 게 맞을까요?

소비와 낭비의 늪에 밀어넣는 현실

예전에는 인간도 마치 고양이과 동물들처럼 단독생활이 가능한 동물이라고 느꼈더랬습니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산다는 건 정말 그러니까요. 만원인 지하철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승객들로부터 '사람'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와 출발지와 목적지가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심지어 그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두리를 키우다보니 인간은 집단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나의 무리를 찾을 길이 없어요. 지난 2년 반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의지한 상대는 가족들, 그리고 산후조리원 동기들과의 채팅방,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전부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웠을까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독박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글에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많이 아픈지, 산후 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에 대해 썼는데요. 문제는 단지 외로움 그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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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 중 신이 나 미끄럼틀을 타는 두리. 두리 아빠 사진가 점좀빼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갑니다. 쓸 만한 데 돈을 썼다면 이렇게 불쾌하진 않을 텐데요. 쓸데없는 걸 사고 버리고, 사고 후회하고, 사고 또 사다보니 돈 버리고 기분도 버리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이마를 탁 쳤습니다. 아! 공동체의 붕괴는 소비의 극대화로 이어지는 거구나. 옆집에서 사고 버린 걸, 내가 오늘 또 사고 있겠구나. 어릴 때부터 경쟁만 시키고 이웃도 사촌도 필요 없게 만든 이 사회는 최적의 소비자를 양성하고 있는 거였구나.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나 참 바보로구나. 온라인 채팅으로 겨우 소통할 뿐이지만 산후조리원 동기들과의 정보교류를 통해 소비의 질이 향상되기는 했습니다. 바이럴 마케팅이 대세인 요즘 인터넷에서 진솔한 정보를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산후조리원 동기들은 오프라인에서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물건을 서로 빌려 쓸 수 없고, 아이들 성장단계가 똑같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물려받기' 역시 안 됩니다. 즉 엄마들이 소비와 낭비의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동네 친구'가 반드시 필요한 거죠. 친구 사귀는 것도 정치의 영역일까요?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평일 낮 시간에 대형할인점에 가면 나처럼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이 참 많죠. 저 엄마들도 나처럼 갈 곳이 없어서, 장 볼 것도 없는데 또 마트에 왔겠지 하고 넘겨짚어 봅니다. 사계절 덥지도 춥지도 않고 수유실도 있고 기저귀 교환대도 있는 이곳, 아이와 나를 반겨주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여기 ○○마트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겠죠. 마침 집 가까이에 대형할인점이 있어 아이를 보는 날이면 으레 유모차를 끌고 오는데 2년이 넘도록 친구는 안 생겼습니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어렵듯이 말이죠.

엄마에게도 '경로당' 같은 공간 생긴다면

엄마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2016년 기준 전국에는 6만5044곳의 경로당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전국에 3492개의 읍·면·동 지역이 있으니까 단순 평균을 내도 행정동 1곳에 최소 18.6곳의 경로당이 있는 거죠. 경로당처럼 부엌도 있고 무료 강좌가 열리는 공간이 엄마들에게도 주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환상적입니다. 사실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 키즈카페를 전전하다보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데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예산으로 엄마와 아이들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와 아기 전용 체육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정치가 문제인 거죠. 일단 공간이 생겨야 사람들이 만날 수 있고 그 안에서 관계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어들겠죠. 만세.

물론 공동체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경제적인 곤란으로 출산을 기피하는 사례는 없도록 한다'는 원칙에 따라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다는군요. 최소한의 양육비는 정부가 책임진다는 건데요. 그 결과 1994년에 유럽 최저 수준이던 출산율(1.66명)이 2015년 기준 1.98명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으로 2016년에는 1.17명으로 또 하락했는데요.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만연한 상황에서 아동수당 도입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대로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이 지급되면 우리 삶이 좀 달라질까요?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월 10만원으로는 왠지 숨통이 트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아봤습니다. 일단 유럽의 여러 나라는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하는 아동수당과 부모의 수입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양육수당 제도를 병행하고 있고, 따라서 지급 금액이 한국보다 높습니다. 독일의 예를 보면, 아동수당은 2016년 기준 190유로로 우리 돈으로 월 25만원쯤 되고 양육수당도 별도로 지급되죠. 만약에 아동수당이 월 10만원이 아니라 월 20만원이라면 삶이 좀 나아질까? 그렇게 생각을 해봐도 피부에 썩 와닿지가 않습니다. 대체 한국에서 애 키우는 것은 왜 이리 팍팍할까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7년에 펴낸 보고서 <양육 지원 정책의 향후 발전 방향>에 인용된 외국 논문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유럽 나라들과 미국 가족정책의 유형이 세 가지로 분류됐던데요. 남성 외벌이 가족정책 모형, 부부 맞벌이 가족정책 모형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장 지향 가족정책 모형이었습니다. 가족정책의 결과는 일·가정 양립의 실현 정도뿐 아니라 시장 의존도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주장인데요. 즉 한국에서 아이 키우기 힘든 이유는 일·가정 양립이 불가능할뿐더러 육아정책의 공공성이 떨어지고 민간에 맡겨져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거죠. 쉽게 말해 국공립 보육시설 이용률이 13% 수준으로 민간 어린이집, 사립 유치원 비율이 압도적인 한국 상황에서 아동수당을 지급하더라도 효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배 속에서 수백 번대 대기번호

또한 아동수당, 출산휴가(육아휴직), 공공보육의 수혜 범위를 지표로 각 국가의 가족정책에 순위를 매겼는데, 부부 맞벌이 가족정책을 실행하는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가 1~4위를 차지했고, 남성 외벌이 가족정책으로 분류된 국가들이 중위권을 차지했습니다. 시장 지향 가족정책을 시행하는 영국과 미국은 최하위였습니다. 단순명료한 결과죠. 저는 엄마들에게 아동수당 월 10만원을 차라리 거부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에 국공립 보육시설 이용률을 4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는데요. 저는 아동수당 지급을 5년 뒤로 미루고, 임기 내 공공보육 수준을 80%까지 올리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엄마의 배 속에 잉태되자마자 수백 번대 대기번호를 받아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월 10만원 대신 건강한 보육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10만원씩 주는 건 결국 시장만 활성화시키는 꼴이기 때문이죠. 2018년 예산에 아동수당이 반영되기 전에, 엄마들이 토론하고 엄마들이 선택하고 엄마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입안되길 바랍니다. 월 10만원으로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 문화센터에 강의료를 내는 대신, 기초자치단체마다 엄마와 아이를 위한 복지관이 만들어지고 동네마다 공동육아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지난 3월25일 이 지면에 연재를 시작했고 동시에 페이스북을 통해 '엄마 정치'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소통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4월22일에는 오프라인에서 첫 만남이 있었죠. 연재를 시작할 때는 지면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함께 정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확신이 들진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엄마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고, 이 지면을 통해 적어도 '엄마 정치'라는 개념을 세상에 던져볼 수는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6월11일에 '정치하는 엄마들'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칼퇴근법 통과와 350억원 규모의 보육 추경예산 통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국회 앞에서 열었죠. 그리고 국민인수위원회를 통해 노동시간 단축과 보육 공공성 확보에 대한 요구를 새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정치하는 엄마들'은 자사고·외고·특목고 등 특권학교의 일반고 전환을 요구하는 특권학교 폐지운동에 동참하기로 했고, 탁현민 청와대 선임행정관의 거취와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학교비정규직 비하 발언에 대해서도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무엇보다 값진 경험은 '엄마 정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그렸다는 점입니다. 엄마 정치는 엄마들이 하는 정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복원하고, 국가와 사회가 집단 모성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정치입니다.

'정치하는 엄마들' 정관 전문(초안)

사람은 삶의 어느 기간 혹은 모든 기간 동안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즉 사람은 생존을 위해 돌봄과 살림을 필요로 하고, 서로 돌봄과 살림을 주고받는 존재다. 이렇듯 돌봄과 살림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이를 사사로운 일로 치부하며 사회적·국가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출산과 육아, 자녀의 교육, 일상적인 가사노동, 간호 등 돌봄과 살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단지 '집안일'이라는 말로 폄하하며, 그 책임을 오로지 '엄마'에게 전가해왔다. '모성'과 '모성애'라는 이름 아래 많은 여성들이 희생과 헌신을 강요받았고, 정치경제적 주체로서 자립할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아줌마와 맘충이라 불리는 혐오와 비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을 낳고 기르고 살리는 돌봄과 살림은 우리 사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가 달린 일로서 엄마·여성·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며, 가족공동체·지역공동체·국가공동체가 서로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이제 모성은 생식적 어머니와 분리하여 돌봄과 살림을 수행하는 모든 주체의 역할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집단 모성, 사회적 모성을 추구해야 한다. 나아가 혈연을 넘어서 돌봄과 살림의 관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해야 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성평등한 관계를 법·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모성을 바탕으로 모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이 처한 정치적·경제적·사회문화적 모순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이러한 목표들을 실현하고자 모인 구성원들의 뜻을 모아 '정치하는 엄마들'을 창립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