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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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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길을 가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성으로 성별이 부여됐지만 남성의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였다. 운전하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남성으로 살아왔고, 호르몬요법 등으로 남성의 외관과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성기 성형수술을 하지 못해 법적 성별은 여성이었다. 경찰서에서 쌍방이 조사받을 때, 혹시나 상대에게 트랜스젠더인 것이 약점이 될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남동생의 주민등록번호를 불렀다. 상대방이 가고 난 직후 경찰서로 돌아가 사실 자신은 트랜스젠더라면서 이름과 주민번호를 밝혔다. 그랬더니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입건했다는 거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딱히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화를 끊고, 지나던 건물 뒤편으로 가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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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 가능한 사진을 제출하라?

2∼3년쯤 지나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남성으로 성별이 부여됐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였다. 성별 정정을 신청한 뒤 보정 명령을 받아 상담하고 법원에 낼 의견서를 작성해줬다. 법원은 여성 성기를 갖추었음을 소명하는 식별 가능한 사진을 제출하라고 했다. 수술확인서를 이미 냈음에도 이를 요구하는 것은 인격권을 침해한다는 의견서를 썼다. 그런데 의견서 대신 사진을 냈다고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인화하면서도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혹시라도 성별 정정이 안 될까 하는 걱정에, 고민 끝에 사진을 냈다는 전화였다. 통화를 마치고, 서초동 법원 앞 골목을 오래도록 서성였다. 그 판사는 지금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2006년 대법원 결정으로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획기적인 결정이었지만, 성별 정정 요건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모든 의료적 개입이 그러하듯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료적 조치도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일률적으로 성기 성형수술을 '처방'했다. 그 고가의 비용이나 고도의 의료적 위험성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었다.

2013년 서울서부지법에서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정정하는 경우, 성기 성형수술이 필요치 않다는 결정이 있었다. 이후 다른 법원에도 이런 결정이 퍼져나갔지만,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정하는 경우에는 변함이 없었다. 해외에서 위헌으로 선언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제 불임도 성별 정정 요건이다. 일부 법원은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기도 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며 성별 정정을 거부하고, 탈의한 전신사진을 내라고 하기도 했으며, 심문기일에서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모든 것은 개인의 성별을 입증하기 위한 조치로 정당화됐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별을 증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이 '입증'의 부담 속에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과 관계와 돈을 걸어야 한다.

성별 정정, 선처가 아닌 권리

6월22일이면 대법원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을 허가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아르헨티나의 성별정체성법 제1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자유로운 인격을 발달시키며, 그에 맞는 법적 성별을 확인받는 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라고 규정한다. 성별 정정은 국가에 애걸하고 '선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권리이다. 이 권리를 찾으려는 트랜스젠더들이 지금도, 법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