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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 Headshot

광수, 화니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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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다. 겨울은 언제나 시리다.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계절 힘들지 않을 때가 있으랴만 겨울이 가장 힘들고 시리다. 늘어가는 난방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탓? 아니, 그냥 춥기 때문이다. 추우면 사람이 좀 달라지지 않나? 난 그랬다. 추우면 달라졌다. 마음의 여유란 게 없이 까칠해지게 되는 날. 그날도 무척 추웠고 한참 예민해 있었다. 영화 일은 잘 풀리지 않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사무실은 춥고....... 일찍 사무실을 나와 '친구사이(한국 게이 인권 운동 단체)'로 향했다. 그랬다. 힘들다고 느낄 때 '친구사이'로 가면 왠지 마음이 놓였다. 여자는 아니지만 친정집에 가는 기분이 이럴 것 같다고 하면 과장일까?

날이 추우면 '친구사이' 사무실도 북적였다. 난방비 걱정에 방열기를 잘 켜지 않아 '친구사이' 사무실은 겨우내 추웠지만 사람들은 여름보다 훨씬 많이 모여들었다. 실제 온도는 낮았지만 체감 온도는 높았기 때문이다. 시린 마음을 데우는 데 게이 친구들만 한 게 없었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체감온도 5°C 상승! 옹기종기 모여 하는 일도 참 많았다. 지금은 사무실도 널찍한 곳으로 옮겼고 회원도 엄청 늘어서 '친구사이' 문화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작은 동아리 같았다. 인권 운동을 기본으로 했지만 짬날 때, 기분을 '업'하고 싶을 때, 보드게임도 많이 했고 작은 티브이 앞에 모여 앉아 <대장금>, <안녕, 프란체스카> 등을 함께 보기도 했다. 물론 술을 더 많이 마시긴 했다.

그날도 여럿이 모였고 게임을 할까 술을 마실까 분분한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십 대 초반의 핸섬한 남자, 화니였다. 아,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났다! 후광! 그랬다. 사람들이 말하는 후광이란 걸 보았다. 그의 등장은 흡사 순정만화, 아니 순정만화 같은 영화, 왜 <늑대의 유혹> 같은 그런 영화 말이다. 딱 그 영화의 '강동원' 등장 신 같았다. 슬로우로 들어오는 그와 그의 뒤에서 빛나는 후광. 그런 그에게 반하지 않는다면 게이가 아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벌써 한 녀석이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이런, 선수를 놓치다니! 빛나는 후광을 달고 자리에 앉은 그는 스물한 살의 앳된 청년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큰 눈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얼굴, 게다가 손가락이 길었다. 이걸 어떡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가 앉은 자리, 아직은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자리에 앉아 그를 떠올렸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무슨 말을 하긴 했는데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럴 만큼 그에게 빠져버린 것. 기억 나는 건 딱 하나 '데이'라는 닉네임이다. 데이, <패왕별희>의 주인공 이름인가? <패왕별희>를 알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친구사이'를 나섰다. 술 한 잔하자며 붙잡는 후배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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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했다. 집에 가는 동안 내내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버스에서도 달리고 싶었지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날따라 차는 막혔다. 버스에 사람도 많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정류장을 두어 개 앞두고 내려서 달렸다. 대문에서 사 층 옥탑방까지 한달음에 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와 서랍장을 뒤졌다. 있어야 한다. 있어야 해. 재킷이 빨간색이었는데, 그래 빨간색 재킷이었어. 아, 여기 있다. 드디어 찾았다. 빨간색 재킷의 <패왕별희> DVD.

오랜만에 보는 <패왕별희>는 자체로 감동이었지만 그날따라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데이라는 이름에 꽂혀 자꾸만 다른 상상했다. 아름다운 장국영도 그날만큼은 빛을 잃었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걸 어째.

혹시 그가 '친구사이'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어 찾았지만 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새로 고침'을 누르고 또 눌러봤지만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글을 남기지 않았다. 초조하다. 담배를 벌써 몇 개비째 피우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썼다면 벌써 걸작을 만들고도 남았을 게다. 하지만 인생이란 꼭 그렇게 흘러가는 법. 집중력이란 놈은 꼭 남자에게 올인할 때만 나타난다. 그날 밤을 하얗게 새웠지만 그를, 그의 흔적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는 잡히지 않을 듯 먼 거리에 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일주일 뒤였다. 처음 등장할 때처럼 또 불쑥 문을 열고 '친구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포스는 여전했다. 아니다. 붙잡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포스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가슴은 다시 뛰었고 머리는 하얘졌다. 오늘은 지난주처럼 그를 보내선 안 된다. 다시 일주일을 그렇게 보낼 순 없다. 꼭 그의 번호를 따야 했다.

연애의 기본은 '밀당'인데, 그와는 처음부터 너무 기울어진 시소게임이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난감했다.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연애 매뉴얼엔 항상 내가 우위에 놓여 있었는데, 이게 뭔 꼴이란 말인가. 하지만 고민할 틈이 없었다. 일단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다시 또 괴로운 나날을 보낼순 없으니. 자연스레 번호를 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 있다. 빙고!

"저 휴대폰 좀 잠깐만 빌려주세요."
"네? 제 휴대폰을요?"
"네, 제 전화기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아서 찾아보려구요. 분명히 가방에 넣어놨거든요. 그런데 안 보여요."
"아, 여기......."

그의 휴대폰을 받았다. 손끝이 스치길 기대했지만 살짝 어긋났다. 아쉽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리. 가방에서 울리는 벨.

"어? 가방에 있었네? 아까는 왜 못 찾았지?"

살짝 웃으며 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아 그리고 이건 제 번호. 난 피터팬이라고 해요."
"전 데이."
"알아요. 지난주에 왔잖아요. 데이는 <패왕별희>에 나오는 그 데이 맞죠?"

그가 방긋 웃었다.

"아, 맞아요. 제가 그 영화, 특히 장국영을 좋아해서요."
"저도 그 영화 완전 좋아해요."

그렇게 번호도 따고 <패왕별희> 얘기를 하며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영화를 하는 사람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얘기하면 주로 그가 듣는 편이었지만 가끔씩 그는 이를 보이며 웃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아득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던 그가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렇게 우린 또 아쉽게 헤어졌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의 번호가 있었으니.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혹시 그가 나에게 연락해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문자를 보낼까? 오늘 보내면 너무 빠르지 않나? 내일이면 될까? 언제가 적당할까? 마음을 전하면서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을 시간은 언제일까?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여는 별거 아닌 그 행위를 반복하며 그에게 자꾸만 빠져들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의 번호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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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이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좋아해본 건. 사랑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나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었다. 누구를 이렇게 심하게(심하게란 표현이 딱 맞다)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삼십 대 초반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와 다음 날 일도 팽개치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그를 이만큼 좋아하진 않았다. 나이 사십에 첫눈에 반하다니. 게다가 그가 너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머리가 하얘지고 어쩔 땐 울컥 눈물도 났다. 중증이다. 혹시 상사병에라도 걸린 건 아니가 몰라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열병에 빠졌다.

지금 돌이켜봐도 설렌다. 평생 다시없을 사랑을 만났고 그 사랑을 만들어갔다. 그로부터 육 개월 정도 그의 옆에서 계속 '알짱'거렸다. 술자리에선 옆 옆 자리에 앉아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해 떠들어댔고 재미있는 행사, 진지한 행사, 스크린쿼터 집회까지 온갖 사회를 자청했다. 그에게 내 존재를 계속 알렸다. 재밌는 사람, 즐거운 사람,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조금씩 조금씩 그가 내게 마음을 열었고 그렇게 우리는 열아홉이라는 나이 차이를 무시하고 사랑을 시작했다.

어젯밤에도 녀석이 갑자기 보고 싶어서 녀석의 미니홈피를 찾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몇 시간을 보냈다.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러지? 빨리 녀석에게서 빠져나오고 싶다. 아니, 솔직히 녀석을 내 걸로 만들고 싶다.
녀석에게 좋은 형이 되어준다고 약속했다. 좋은 형...... 녀석을 봐도 가슴 떨리지 않고 녀석의 입술을 탐하지 않고 녀석을 그냥 그대로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고 싶다.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2005년 어느 날, 블로그 일기에서.

* 이 글은 <광수와 화니 이야기>(김조광수, 김승환 저, 시대의창)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