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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남자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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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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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두 번 커밍아웃했다. 한 번은 "엄마, 나 학생운동하고 있어요"였고, 두 번째는 "엄마, 나 동성애자예요"였다. 두 번 다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첫 번째 커밍아웃을 했을 때 엄마는 많이 놀랐다. 엄마는 고향이 평안남도 맹산인 이른바 실향민이다. 1939년생으로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는 이북에서 사셨고 1.4 후퇴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남쪽으로 피란하시다가 사리원에서 미군 폭격으로 하나밖에 없는 언니를 잃은 뼈아픈 경험이 있는 분이다. 엄마는 레드콤플렉스가 강했다. "빨갱이라면 치가 떨린다"는 말씀을 많이 한 걸로 기억한다. "학생운동을 한다"는 나의 고백을 엄마는 '빨갱이가 되었다'로 들으시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한동안 말씀을 못 하셨다. 그 뒤로 엄마와 난 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 나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나의 미숙함 탓이기도 했지만 엄마의 빨갱이 알레르기 탓이기도 했다. 급기야 가출해 학교에서 먹고 자는 일까지 벌어졌다. 엄마는 나를 잡으러 학교에 매일 출근하듯 하셨다. 그러다 난 군대를 갔고 엄마는 내가 그렇게 학생운동과는 멀어지겠거니 생각하셨다. 그렇지만 광주 학살의 원흉이 대통령으로 있는데 학생운동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복학하고 다시 학생운동에 매진했고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게 되었다. 단과대 학생회장은 구속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엄마를 설득하지 못하는 아들의 괴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때마침 학교에 '애국한양 어머니회'라는 모임이 생겼다. 학생운동을 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들의 모임이었는데, 엄마는 그곳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차츰 아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다 내가 구속되면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도 나가셨다. 그러면서 엄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모두 빨갱이들 때문이라는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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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엄마에겐 나의 두 번째 커밍아웃이 더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청천벽력과 같았다"고.......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럼없이 대하게 될 때까지 엄마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셨다. 밥을 짓다가 빨래를 개다가 길을 걷다가 문득 아들이 게이라는 생각에 울컥 눈물을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셨다고 하니 엄마의 고통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빨갱이 아들보다 게이 아들을 더 견디기 힘들어 한 엄마였다. 그러다 차츰 머리로는 이해하게 되셨다.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혼자 감당해야 했고 그 때문에 고통이 크셨단다. 지금은 아들의 동성 연인과 같이 여행을 가서 한 방을 써도 아무렇지도 않고 게이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에 여장한 아들이 나와 사회를 봐도 큰 소리로 웃으며 박수 치시지만 한동안 엄마의 가슴은 시커멓게 썩어들었다. 그때 엄마 주변에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는 혼자였다. 과거의 엄마처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동성애자 가족들에게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광수와 화니 이야기>(김조광수, 김승환 저, 시대의창)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